사실은 너무너무 긴장이 된다.
그의 사랑한다는 말에 답을 해준 적도 없는데, 더군다나 이렇게 가족식사라니. 이런 나를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해줄지 나로서는 두려움이 앞서는 일이다.



- 내가 웃게 해줄게, 민규야........ 이제껏 아팠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혹시 울 일이 생기더라도......... 꼭 내 품에서만 울게 해줄게....... 나랑 사랑하자....... 응?? 나랑 오래오래 사랑해....... 사랑하자.... 민규야..........

- 나.. 나는.. 조금만 더 생각.. 해볼게..


그리고 또 나는 망설일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이렇게 그의 사랑에 대한 어떤 대꾸도 없는 채로 그를 받아줘버리는 것이 그를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그에게 고마워서인지 내 자신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의 가족들을 만나도 되는 것인지 확신은 없지만 역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




"저기 나.. 편의점까지 왔는데.."
- 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천천히 와도 돼.."
- 아니야.. 추우니까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어..

뭐 추워봤자 얼마나 춥다고..
그는 내가 늘상 추워 보이는 건지 언제나 춥다고 안달이다.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생겼나.



집에 가져갈 선물로 형수님이 임신하셨다기에 산 아기 신발이 든 앙증맞은 쇼핑백과 최근에 담배를 끊으셨다는 아버님께 주전부리 하시라고 양갱을 사서 달랑달랑 들고 편의점 문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제법 누그러진 날씨가 적당히 쌀쌀해서 오히려 상쾌하다. 살짝 날카롭게 스치는 바람이 타닥 타닥 규칙적인 소리가 섞여 날아든다.
소리보다 약간 늦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서 바로 나온 듯 트레이닝 바지에 큼지막한 점퍼 차림이다. 문밖에 선 나를 보더니 큰일이라는듯 얼른 달려와서 그 큰 점퍼 안에 나를 가둔다.


"야! 길가에서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집까지 안내나 해!"
"뭘 사왔어.. 그냥 오지.."
"그냥.. 별거 아니야.. 내가 너보다 돈 잘 벌어!"
"그래.. 얼른 가자, 너 춥겠다.."
"이 정도로 안 추워.. 넌 지금 춥냐? 완전 봄날씬데.."
"이렇게 추운 봄은 또 처음인데.."
"하여간 나이도 어린 게 한 마디도 안 져요.."


자기가 신은 슬리퍼 속의 양말 한 장이 더 시려 보인다는 건 아무래도 모르는 듯 하다.






"아버지, 어머니! 민규 왔어요! 형님, 형수님!!"
"쟤는 안 그러던 녀석이 뭐 저렇게 수선을 피워.."
"안녕하세요.."
"어서 올라 와.."
"들어 와서 앉으세요."
"네에.. 저기 선물.. 좀 준비했어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까 받아주세요."

올라 서는데 현관에 둘러 선 그의 형님, 형수님, 어머니 뒤로 아버님께서 다소 굳은 표정으로 돋보기를 코끝에 얹으시고 눈만 들어 나를 보고 계셨다. 역시 아버님께는 안 되는 걸까..
익숙한 압도감이 엄습한다.


"들어 오게. 날이 춥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네 장기 둘 줄 아나?"
"네, 조금.."
"뭐 마실 거라도 드시겠어요?"
"형수님, 그런 건 제가 할 게요."
"도련님, 너무 속 보여요!"
"윤석아.. 컵 깨뜨리지 말고 나가 있어."
"어머니이.."

막내 아들인 그가 귀엽다. 사랑 받으며 자랐구나..
지금이야 저렇지만 커밍아웃 했을 때는 어땠을까.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더니..


"장기 잘 두세요?"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네."


윤석이 다가와 옆에 앉는다. 슬쩍 바닥에 짚은 손을 잡으려고 해서 찰싹 쳐낸다.


"어허.. 장기 두던 사람 어디 갔나.."
"장기는 본디 진득 하니 두는 거야."

아버님이 몰리시는지 형님이 으름장을 놓으신다. 할아버지, 아빠, 삼촌에 손님까지 모여드는 게 신기했던지 그의 어린 조카가 장기판 근처로 다가와 앉는다. 장기판 위로 빼꼼 내려다 보는 작은 뒤통수가 귀엽다.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민규예요, 주민규."
"네 녀석한테 안 물었다."
"주민규 맞습니다."
"양친은 생존해 계신가?"
"어머니느.."
"아버지! 그런 걸 초면에.. 물으시면 어떡해요.."
"아니야. 어차피 아실 건데 뭐..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뵐 수 없었고, 아버지도 집을 나가셔서 못 뵌 지 한참 되었습니다."
"어허.. 무슨 일로..?"
"아버지!"
"괜찮아.. 알콜중독이셨는데 기운을 좀 차리시더니 나가신 뒤로는 못 뵈었습니다. 한 3년 정도 됩니다."
"흠흠.. 장기 두던 사람 어디로 갔나.."
"그래도 바르게 잘 자란 모양이구먼."

안심한 듯한 그의 웃는 표정이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다.
아까 쇼핑백을 받아 들어간 부엌쪽에서 갑자기 탄성이 들린다.

"어머니.. 이거 정말 예뻐요.."
"그래.. 그렇구나.."
"뭔데요, 어머니?"
"아.. 민규 씨가 주신 선물인데요.. 아기 신발요.. 정말 고맙습니다. 예쁘게 신길 게요."
"별말씀을요.."
"아버님, 여보..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민규 씨가 사온 양갱인데 비싼 건가봐요. 아주 맛있어요."
"당신도 참.. 비싼 거 같단 얘기는 하고.. 참.."
"아빠.. 나 저거.."
"먹고 싶어? 그래.."
"이름이 뭐예요?"
"쭌이예요.."
"몇 살이에요?"

그의 조카가 고민하면서 손가락을 센다. 시간이 너무 걸리자 민망한 듯 형님이 대신 대답해주신다.


"세 살이야.."
"네.. 삼촌 좋아요?"
"네에.. 혀.. 아는요..?"
"어..? 아.. 응.."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몸둘 바를 모르게 가족들이 반겨주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소하게 퍼지는 기름 냄새가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명절날 풍경 같다. 지금 이게 정말 내 인생에 예정 되어 있던 시간이 맞을까. 남이 누릴 시간을 훔쳤다거나, 아니면 꿈이 아닐까.


"저.. 저기.. 윤석아.. 도.. 동태.. 포.. 포는.. 어디서 샀어?"
"응?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포.. 있잖아.."
"어엇! 훈수 두기 없기야!"
"장군이오-."
"아버지!"
"무르기 없다."
"아니.. 민규 씨.. 훈수 두고 그러면 반칙이야!!"
"장기 두던 사람 어디 갔나.."

그가 웃으면서 슬쩍 바닥에 손을 짚고 내게 기대어 앉는다. 깜짝 놀라 몸을 떼려는데 오히려 못 움직이게 하려는 모습에 내 마음만 조마조마 하다. 눈치를 살피며 얼른 흘겨보자, 못 본 척이다.

"에헴.."
"저도 장군입니다, 아버지."

한참을 고민하더니 형님이 다시 아버님께 의표를 찌르는 수를 두셨다.

"그래.. 국회에서 일한다고?"
"네. 박○○ 의원님 비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장기 좀 두세요"
"형제는 있나?"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몸이 좀 아파서 병원에 있습니다."
"많이 아픈가?"
"아버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세요! 아야! 왜 때리고 그래, 형은!"
"너 이 놈 자식, 아버지께 말버릇이 그게 뭐야! 사내 자식이 헤벌레- 해서는."
"자폐증입니다. 혼자 돌보는 데는 소홀해지고 어려워서 병원에서 지내게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제가 좀 안정되면 같이 살고 싶습니다."
"흐음.."
"아버님.."

아버님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신다. 씩 웃으며 한 말씀 드렸다.

"차.. 좋아하세요?"
"아니, 민규 씨! 훈수 두면 반칙이라니까!!"
"어허.. 무슨 훈수를 뒀다고.. 장군이다.."
"아버지도 참.. 그냥 제가 진 걸로 해요! 여보.."


형님이 형수님을 부르며 부엌에 들어가시고 어머니가 대신 나오셨다. 어머니는 아버님 옆에 앉으시더니 뉘집 자식인지 잘 생기기도 했다면서 손을 잡아주셨다.

"근데 참.. 손이 거칠하네.. 남자 손이 왜 이래..?"
"어렸을 때 멋도 모르고 맨손으로 설거지 해서요.. 이젠 안 그래요.."

아버님이 하셨던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또 하시고 그가 옆에서 또 버릇 없이 대들었지만 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부끄러운 거지 인규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고생이 많았겠구나.."

어머니가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시더니 가엾다는 눈을 하셨다.


"아니에요..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렇게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


나를 안타깝게 보시던 어머니가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부엌에서부터 들리는 형수님의 목소리에 얼른 눈물을 훔치신다.



"어머니, 상 들여가도 돼요?"
"오냐.. 윤석인 어여 거들잖고 뭐해?"
"네!"


상이 들어올 자리를 두고 옮겨 앉으려 몸을 일으키는데 등을 툭툭 토닥여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에 눈물이 핑 돌고 만다.

형님과 함께 그가 넓은 상을 들여 왔다. 처음 접해보는 상황에 멍하니 서 있자 그가 와서 손을 잡아 끌더니 제 옆에 앉힌다.

"민규 씨 자세히 보니까 정말 잘생겼다.. 왜 연예인 안 했어요?"
"그쵸 그쵸, 형수님?"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리 촐싹거리는지 몰라.. 그렇게 좋으니?"
"이 녀석, 그만 하고 조용히 밥이나 먹어.. 민규 씨 많이 들어.."
"잘 먹겠습니다.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우리 형수님 해파리냉채 진짜 맛있어, 자.."
"너 진짜 왜 그래.."
"어험.. 많이 들게."
"네, 아버님."



잔뜩 들떠서 좀처럼 진정하지 못 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다. 소풍 가기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처럼 귀엽다.

"그래.. 우리 집에는 언제부터 들어올 생각이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이셔?"
"아 그러니까 그게.. 나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그랬거든, 집에서.."


맙소사.
어린 애 같은 것도 정도가 있지.
아버님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상 아래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얏! 왜 꼬집어!!"
"으이구! 이 녀석아. 벌써부터 잡히고.. 네 앞날이 훤하다, 아주.."
"혀엉!"
"민규 씨, 전 민규 씨 편이에요!"
"형수니임.."
"너 좀 조용히 하고 밥 먹어.. 민규가 가정교육 엉망이라고 흉보겠다."



만나자마자 편하게 대해주시는 어머니, 말씀은 적으시지만 따뜻한 아버님, 정말 친형님 같은 형님, 쾌활하시고 상냥한 형수님, 귀여운 조카..


"민규 들어와 살려면 집 좀 넓혀야겠다. 그렇죠, 여보?"
"그럴까.."
"민규 덕분에 집도 고치게 생겼네.. 집안에 복이 넝쿨째로 드는가보다.."



내가 그렇게 내치려고 애를 써도 그가 나를 감싸려고 했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이렇게나 따뜻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해주고 있고, 그도 사랑하고 있어서 나 같이 하찮은 인간도 감쌀 수 있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과 같이 사랑하고 싶다..
이렇게 편하고 밝게 웃는 사람들 곁에서 같이 웃고 싶다.
그렇게 웃는 그를 계속 보고 싶다..








"민규 씨.. 밤도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세요.. 저희도 원랜 가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있잖아요.."
"그러렴.. 윤석이 방에 이부자리 더 있으니까 침대에서 자고 가요.. 윤석이 녀석 바닥에 재우고.."
"그래도 어떻게.."
"사양 말고 자고 가, 민규 씨. 윤석이 너 이 녀석 빨리 데리고 들어가.."
"들어 가자.."
"정말 괜찮은데.. 택시 타고 가면 되요.."
"내일 출근하나?"
"아니오, 아버님.."
"그럼 자고 가거라.."
"자, 가자.."
"야야, 인사는 하고 들어 가야지!"
"어머니, 아버지, 형, 형수님 안녕히 주무세요! 조카! 좋은 꿈 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그의 방안은 지극히 평범했다. 학생들이나 쓸 것 같은 조금 작은 침대, 책상, 작은 농구골대, 신문 스크랩북이 빼곡이 꽂힌 책장, 적당히 정돈된 옷가지..


"앉아.. 오늘 피곤했지? 미안.. 어려웠을 텐데.."

침대에 나란하게 앉자 그가 물었다.


"아니.. 다들 정말 좋은 분들이셔서 내가 고마워.. 되게 부러웠.."

말을 다 마치지도 못 했는데 그의 입술이 말을 막아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가 부모님들 다 계신 집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한 건지 팔로 허리를 감아 오는 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왜.. 겨우 둘만 있게 됐다고 좋아했더니.."
"여기서 뭘 하려고.. 다 들리겠다.."
"아무 것도 안 해.. 그냥 키스 좀 하자고.. 하루 종일 네 입술이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데 이건 뭐 옆에 있어도 키스도 마음대로 못 하겠고.. 참느라 혼났으니까 좀 하게 해줘.."


못 말린다. 오늘따라 아이 같은 그가 귀여워서 넘어가주고 싶기도 하다.

"알았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내가 먼저 입을 맞췄다. 어느 새 입안에 들어온 달콤한 그의 혀가 다시 나를 녹여낼 듯이 휘감는다. 등에 닫는 따뜻한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온몸이 따뜻해져 간다.

"으음.."


내 뒤통수를 당겨 더 강하게 빨아들이던 그의 키스가 입술을 떠나 목으로 내려 갔다. 더 꽉 끌어 안아 나를 눕히려는 그의 움직임에 놀라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 그도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더니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저기.."
"아니.. 내가 미안.."
"아, 저기..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이대로는 곤란해.. 미안.."
"윤석아.."

내 더러움이 옮아갈까봐 그를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다. 그는 괜찮다고 할 테지만 아직은 내가 할 수가 없다.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를 돌려세우고 만다.

"이리 와봐.. 내가 도와줄게.."


다시 내 옆에 앉은 그를 침대 위에서 내 앞에 앉혀 뒤에서 허리를 끌어 안았다.

"저기 민규야.. 무리 안 해도 돼.. 혼자서 하면 되는데.."
"아니.. 나 때문이잖아.. 나도 네가 좋은 게 좋아.. 그래도 나는 안 되니까.."

그의 등 뒤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티셔츠를 벗기고 단단한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그의 상체를 어루만지던 손을 그가 잡아 멈춘다.

"괜찮아..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반대로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잡아 내 등 뒤로 돌리고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발기된 단단한 페니스가 손에 잡힌다.

"하악.."

그의 고개가 살짝 꺾인다. 그의 뒷목에 입을 맞추며 그의 페니스를 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후우.. 후.. 하아.."


속도를 달리 해가며 문지르자 그의 숨죽인 신음소리가 부서진다.


솔직히 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나를 원하지 않을까봐 겁이 난다.


"하읏.. 하아.. 읏.."


그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찾는다. 손으로는 그의 페니스를 문지르며 움직이면서 엉덩이며 허벅지 위에 주체하지 못 하는 그의 손을 느낀다.

내 욕심으로는 이런 나라도 그가 계속 나를 원해주기를 바란다.

쾌감으로 조금 일그러지는 얼굴과 함께 그의 키스가 격렬해진다. 내 손의 속도와 함께 그의 절정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하윽.."

내 손에 사정한 것이 미안하고 민망했는지 그는 사정을 하자마자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내 손을 끌고 화장실에 데려갔다. 손수 손까지 씻어주며 미안한 표정이다.

"이런 일까지 시켜서 미안해.."
"시킨 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사랑해.. 이런 거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사랑해.."
"아니야.. 내가 미안.. 괜히 나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마.. 그냥 이것만 알아줘.. 난 너만 원해..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원하는 사람이 너야.. 섹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너라는 사람을 내가 너무나도 원해.."

대체 내가 뭐라고..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일까. 이렇게 과분한데.. 내가 정말 받아도 괜찮은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이..

"바보야.. 그렇다고 하나도 안 괴로운 건 아니야.. 나쁜 생각하지 마. 언젠가 내가 너 잡아 먹고 말 거야."

















사무처에 일이 있어서 다녀왔더니 그 새 우편물이 하나 와 있었다. 누런 서류 봉투에 꽤 두꺼운 물건이 들어 있다.


"민규 씨 왜 그래요?"
"주 비서관.. 무슨 일이야?"


갑자기 우편물을 떨어뜨리자 소리가 제법 컸는지 모두 나를 쳐다본다.


"아니에요. 별일 아니에요. 저기 다른 의원실들 보좌진들은 언제 떠난데요?"
"정말 괜찮아? 아직 회복 다 된 거 아니면 쉬어도 돼. 가서도 험한 일 할지도 모르는데.."
"아니에요. 제가 선발로 먼저 가 있을게요. 황 기자가 취재 겸 같이 가자고 그래서 이제 금방 올 거예요."


오늘은 우리 의원님이 속한 소모임에서 노숙자 쉼터인지 행려병자 수용소인지로 봉사활동을 간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어이, 마침 잘 왔네. 주 비서관 안색이 안 좋은데 쉬게 해야 되는 거 아닌지 좀 봐봐."
"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가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보더니 깜짝 놀라 내 얼굴을 쳐다 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마도 멍할 내 얼굴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떨린다.


"너 그냥 쉬어라."
"그래요, 민규 씨. 안색 많이 안 좋은데.."
"진짜 괜찮아요. 가자. 좀 이따 뵈요."




의원실을 나와 무슨 정신으로 이동했는지, 차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그거.. 사진이랑.. 같이 든 메모지에.."
"떠올리지 마. 어떤 놈인지 찾기만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찾게..? 누가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할까.."
"두고 봐. 내가 찾기만 하면.."
"불쌍하다.. 나를 그렇게 미워 하느라 얼마나 힘들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를 미워 한다는 건 대단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물론 내가 남 걱정할 처지가 전혀 못 된다는 건 알고 있다. 그에게도 처음에 주제 넘은 말을 지껄였을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나라면 조금 참견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억지를 부려보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한 시간쯤 뒤에 저희 당 개혁모임 의원님들 오시기 전에 보좌진으로 미리 왔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저희 일이 좀 험해서.. 괜찮으실지 모르겠어요."
"저희 의원님들은 선심성 행사 하시는 분들 아니니까요. 걱정 마시고 보통 봉사자들처럼 대해주세요."
"그래주시면 고맙죠.."
"정확히 여기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아.. 이 분은.."
"아, 오늘 취재 기자예요."
"아, 네.."
"저희는 간단히 말해서 호스피스 병원이고요, 행려병자, 치매노인분들도 계십니다."
"네.."
"오늘 도와주실 병동은 행려병자로 오신 분들이 계신 곳과 치매노인병동입니다. 재활 치료 중이시죠."


역시 쉬었어야 했던 걸까.
내가 바로 조금 전에 했던 말에 이런 식으로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오랜 미움과 증오가 빠져나갈 틈을 여기에 와서 찾은 건지도, 아니, 아예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highen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