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vs. 소설가
(4) D-17
두 분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수많은 강아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통영으로 돌아가는 페리를 탔다. 올 때와는 달리 그는 바다만 바라 보지 않고 피곤한 얼굴로 나와 나란히 배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졸려."
"나도. 왜 거기서 그러고 잘 생각을 했을까. 카페 안에서 자도 되고 산장으로 갔어도 되는데."
정말 피곤한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내 어깨로 뚝 떨어뜨렸다.
"목도 엄청 뻐근해. 그러게 높이 맞추려고 했더니 자다가 팔은 왜 빼냐?"
"팔 저리고 춥잖아. 사람의 생존 본능이지."
확실히 나는 사람을 어떠한 특별한 계기 없이 친근한 관계 안으로 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여자도 쉽게 꼬시지 못 하고, 여자 친구도 별로 없었다. 여자들은 이런 내 성격을 보통 너무 진지하고 재미 없게 생각했다.
어설픈 소설가의 꿈도.
"너도 진짜 은근히 웃기다니까. 여기 올 때 까지만 해도 완전 딱딱하게 대답만 하더니.."
연신 하품을 하면서 말을 잇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후드티 안의 목을 간지럽게 했다. 겉만 간지러운 게 아니라 목 안쪽도 간질간질 한 것 같다.
"어? 너 기침하네. 감기 걸렸나보다."
"응? 그냥 기침만 나고 전혀 괜찮은데?"
기침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고 마주 쳐다보던 그에게 대답하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완전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목소리도 갔는데?"
"잠 못 잤으니까. 진짜 괜찮아."
못 믿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내밀더니 다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졸음 운전 하지 마. 나 죽기 싫어."
"존명."
뇌가 없어 진 게 확실한지 이젠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당연히 든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그가 조금 웃는다. 이윽고 배가 여객 터미널에 닿았고 '끙!'하면서 벌떡 일어난 그와 달리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자."
"응."
대답만 하고 일어나지 않자 그가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한참을 잡아 당겨도 내가 꿈쩍도 않는데 애쓰고 있는 모양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았어. 일어날게."
일어나면서 잡힌 손을 확 잡아 당겼더니 단숨에 일어난 내 품으로 갑작스런 힘에 놀라 넘어지지 않으려 잡히지 않은 나머지 팔을 휘젓던 그가 넘어지면서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뭐야! 갑자기!"
깜짝 놀란 그가 화들짝 떨어지면서 꿀밤을 '콩' 때렸다.
"빨리 따라 와!"
쏘아 붙이고 돌아 서는 그를 냉큼 따라 가서 그의 짐을 빼앗아 들었다. 왜 그러는 건지 스스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차장에 세워 뒀던 차를 빼서 비용을 계산하러 가서 주차장 아저씨에게 몇 번이나 공손히 인사하고 나오는 그를 태웠다.
"아저씨가 반갑다고 그냥 가래. 하루 주차비 장난 아닌데 좋다."
"응."
"몇 시간 걸릴지 모르니까 꿀빵 사가자. 차 안에서 먹게."
"그래. 근데 길 가르쳐 줘야 돼."
"異議なし!""
그가 간간이 한 입씩 떼어서 입에 넣어 주는 꿀빵을 먹으면서 운전을 했다. 내려 갈 때와 달리 올라 가는 동안에는 그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고 좌석에서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서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다가 잠시 멈췄다가 그렸다가 잠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 그려?"
".. 응..?"
물어도 재빨리 대답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집중하면서 스케치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먼저 묻거나 하는 일 없었던 나였던 건 아는지 모르는지 반응이 시원찮아서 약간 실망했다. 대답은 못 듣는 건가 하고 그냥 운전하는데,
"그냥 잊기 전에 그리는 거야. 지금같이 생생할 때."
하고 나를 정확히 쳐다 보면서 대답해 주었다. 내가 약간 실망한 것 마저 알아 차린 건가. 4B 연필을 쥔 손가락, 스케치북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운전 중이라 스치면서 보는데도 꼭 만화에 나오는 것 같다.
"손이 남자다워."
"응?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운전을 하던 손이 왠지 따가워졌다.
"내 손은 맨들맨들한데 네 손은 막 힘줄도 있고 마디도 굵어서 딱 남자손이란 느낌이잖아."
"그런가."
"응."
대답을 하더니 또 열심히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있는 모습을 잠깐씩 보다보니 굉장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이 저렇게도 구겨지나.
"그 자세 안 불편해?"
".. 별로. 스케치할 때는 습관되어서.."
함께 한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평소 식탁에 앉을 때도 의자에 그렇게 앉았던 것이 그제서야 어렴풋 떠올랐다.
"평소에도 의자에 그렇게 앉잖아.?"
"내가 그래..?"
"응. 몇 번 본 것 같아서."
"나도 몰랐네, 그건. 역시 입식보다는 좌식 생활이 편한 건가. 저 앞에서 꺾어서 터널로 가야 돼."
"응."
성능 좋고 유능한 네비게이터의 안내에 따라서 운전했더니 집까지 단 한 번도 실수하거나 지체하는 일 없이 올 수 있었다. 주차를 하고 짐을 챙겨서 며칠 살지도 않았건만 반가운 집으로 들어 갔다.
"자고 싶어, 아님 배 고파?"
"우선은 자고 싶어."
"그럼 먼저 씻어. 난 내려 가서 씻든지 할게."
"내려가서?"
"작업실 옆에 욕실 하나 있으니까."
"아-."
"씻어. 나도 씻고 올 거야."
"응."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놓은 것처럼 몸이 늘어지는 것이 필시 감기가 올 것 같아서 얼른 자려고 갈아 입을 옷가지들을 준비해서 욕실로 들어 가서 씻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여야 할 비대칭의 지붕이 아니라 사각형의 하얀 천장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생각도 들고 해서 고개를 움직이려고 하다가 문득 이마 위에 물수건이 올려져 있는 것을 느끼고 더욱 상황 판단에 장애가 느껴졌다. 그 때 때마침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 불빛이 세어 들어 왔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앞다투어 들어 오는 형광등 불빛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가 말을 걸었다.
"어? 깼어? 놀랐잖아. 조용해서 가보니까 욕실에서 쓰러져 있어서."
아, 그랬구나.
"바보같이 그 지경이면서 운전을 몇 시간이나 하고 오냐. 얼마나 둔하면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냐."
그는 화가 난 듯, 불평을 늘어 놓았지만 목소리에서 얼마나 놀랐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욕실 문을 열어 봤는데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이 정도 불평을 할 법한 사건이라는 건 인정한다. 근데 내가 그 정도로 아팠단 말인가. 운전할 때는 긴장해서인지 전혀 그 지경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꼼짝말고 그대로 있어. 오카유 가지고 들어 갈게."
빛에 약간 익숙해진 뻑뻑한 눈으로 그를 보니, 역광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고 다만 그의 몸보다 훨씬 큰 옷들이 잔뜩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증상은 어때? 아직도 열 안 내렸어?"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서 쉰 소리만 새어 나왔다.
"일단 오카유부터 먹고 약도 먹자. 기다려."
조금 뒤에 쟁반을 들고 나타난 그는 방의 불을 켰는데 생각보다 너무 밝아서 이마 위의 물수건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조금 후에 수건을 치우고 눈을 깜빡깜빡 했더니 그의 얼굴이 쓱 하고 시야에 들어 왔다.
"조금만 일어나자."
말과 동시에 목 뒤로 그의 팔이 들어 와서 무겁디 무거운 내 몸을 일으키려 안간 힘을 썼다. 기대에 부응해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서 겨우 반쯤 일어났다. 다행히 다 일으키지 않아도 등 뒤에 기댈 만한 벽이 있었다. 이제보니 나는 따뜻한 방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목욕하면서 가지고 들어간 내 것으로 보이는 흰 티셔츠 위에 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카디건을 뻘뻘 흘리고 있는 땀으로 잔뜩 적시고 있었다. 일어나면서 툭 떨어진 물수건을 옆으로 치운 그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이불-밑에는 내 다리가 있는-위에 놓았다. 쟁반에는 죽같은 음식과 백김치.
"한국에서는 죽이라고 하지? 오카유는 일식이야. 원랜 감기에는 우메보시랑 먹어야 되는데, 백김치랑 먹어도 맛있더라."
역시 또 뭔가 대답하고 싶었는데 목에 무엇인가 꽉 차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소리가 안 나왔다.
"겉에서 보기에도 목도 부었네. 얼른 먹고 약 먹자. 아- 해."
혼자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은 못 하고 손을 저었더니 잘못 알아 듣고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며 굳이 '아-'하란다. 할 수 없이 받아 먹으니까 착하다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다. 먹으면서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서 그냥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가 좋아하는 짙은 남색의 얇고 펄럭펄럭한 통이 넓은 허리를 조이는 끈의 끝이 살짝 보이는 바지와, 아무 무늬도 없이 옆으로 긴 타원형인 네크라인의 흰 티셔츠, 그 위에는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허리끈과 큰 후드, 큰 주머니가 두 개 달린 바지와 같은 색깔의 니트를 입고 있었다. 겉에 입은 니트는 정말 큰 옷인지 내 입에 죽을 한 숟가락 씩 넣어주고 있는 그의 하얀 손의 손등까지 덮을 정도였다. 불편할 텐데 내내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고, '너무 걱정된다.'를 얼굴에 써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죽을 삼키는 모양을 신중하게 봐주고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검은 가죽 끈 목걸이의 끝이 티셔츠에 가려져 있었고, 양쪽 귀에는 새끼 손톱만한 십자가가 달랑거렸다. 숟가락을 쥔 손의 새끼 손가락은 계속 편 상태였고, 내가 잘 못 넘기고 있을 때에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백김치도 한 입씩 먹여주었다. 오카윤지 뭔지는 끓인 밥 같은 평범한 음식이었다. 다 먹고 물까지 입에 대어줘서 한 모금 마시고 나자, 그는 휴지를 한 장 뽑아서 입가까지 닦아준 뒤 쟁반을 들고 나갔다. 속으로 따뜻한 게 들어 가니까 겨우 주변을 둘러 볼 만한 여유가 생겼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방의 가장 안쪽이었고 발쪽에는 무릎 높이 정도로 'ㄱ'자의 짙은 남색의 장이 있었다. 장 안에는 유리문 안의 미니오디오가 보였고 나머지 칸은 서랍이나 창호지문으로 속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 화장실과 연결되는 벽에는 옷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둘러 보는데 그가 자리끼를 받쳐 들고 와서 장 위에 놓고는 서랍을 열어 약 같은 것들을 뒤적였다.
"자, 여기. 알약 넘길 수 있겠어?"
입에 넣어주고 물까지 대주면서 이마에 손까지 짚어본다.
"열이 안 떨어지네."
다시 걱정 광선을 한 번 쪼여주더니 아까 내 이마에 올려 놓았던 물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대야를 들고 들어 온 그는 물수건을 짜서 내 이마에 얹더니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주었다. 이불을 덮어주려고 잠시 숙이느라 티셔츠 속에 숨어 있던 그의 목걸이 펜던트가 드러났다. 은색의 동그란 물고기 모양 펜던트. 볼록해서 갑자기-어린애 같이-톡 건드려보고 싶었지만 솜이불의 포근함에 몸이 이불에 녹는 듯한 기분이 들어 손을 들 여력은 생기지 않았다.
"일단은 자고, 내일은 병원 가든지 하자. 열이 참 안 떨어지네."
그는 베개 맡에 있던 귀로 재는 체온계로 체온을 재더니 더욱 심각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해졌다고는 해도 이렇게 상전 대접-적당한 표현인지 확신은 없지만-받아도 되는 건가. 게다가 고작 감기로.
"나 문단속하고 올게. 그 때까지 자."
그는 말을 마치고 장 위에 있는 작은 스탠드만 켜 놓은 채로 형광등을 끄고 방을 나섰다. 그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잠이 스르르 밀려 왔다. 살풋 잠이 들었는데 그가 다시 들어오는 문소리가 났다. 문소리에 살짝 깼지만 그가 미안해 할 것 같아서 눈은 뜨지 못하고 실눈만 뜨고 있었다. 그는 내 곁에 앉아서 물수건을 갈아주고, 식은 땀을 닦아주었다. 수건이 차가울 때마다 움찔거렸지만 이내 잠을 이길 수가 없어졌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새벽에 목이 타서 눈이 떠졌다. 눈을 제대로 다 뜨지 않은 상태에서 새벽의 싸늘함과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아직도 몸이 완전히 원상복귀된 게 아닌지 무거웠다. 웬만하면 목 마른 거 참고 자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목이 너무 말라서 마음을 다잡고 머리부터 조금 일으켰는데 몸이 무거운 건 몸의 상태보다도 밤새 날 간호하다가 내 가슴께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그 때문인 것 같다. 잠든 그는 새벽 기운 때문에 추운지 무의식 중에 다리는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있다. 자다가 겉에 입은 헐렁한 니트가 내려가 넓은 네크라인에 무방비로 드러난 목덜미가 추워 보였다.
"痛くなくて下さ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 지금 몸을 일으키면 알아 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하는 그를 깨울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하고 이대로 계속 자면 불편할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그래도 역시 편히 자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밤새 많이 회복한 모양인지 몸이 꽤 움직여졌다.
"으.. 응..?"
역시나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잠에 깬 그는 잠에서 완전히 깬 건 아닌지 눈을 채 뜨지 못해서 주먹으로 마구 문지르면서 물었다.
"왜? 많이 아파..?"
"아니. 물.."
목소리가 처참했지만 아예 소리가 안 나오던 어젯밤보다는 장족의 발전이다. 물까지 말했는데 그는 얼른 물을 떠서 입에다 대준다. 자면서 내려 간 헐렁한 옷을 다시 고쳐 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물을 다 마신 나를 지켜 볼 때까지도 눈을 한 쪽만 뜨고 있던 그는 내가 다 마신 잔을 다시 놓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나 때문에 무거웠지. 언제 잠들었지.."
"그 보다도.. 허리나 등 아프지 않아? 편하게 자."
편하게 자려면 옆에 다른 요를 깔거나 하는 게 좋겠지만 눈도 못 뜨고 있는 그가 안쓰러워서 그냥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옆으로 조금 비켜 누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으로 자꾸만 하품이 나오는 입을 가리면서 그 자리에 눕더니 이불을 배쪽으로 끌어 덮었다.
"미안. 많이 안 비켜도 돼. 너무 졸려서 못 일어나겠어."
아기 같이 웅크리고 누운 그는 이내 잠이 들어버렸고 내가 베고 있던 베개를 반 나누어서 괴어주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바로 눈앞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가 눈을 뜨고 있지도 않은데도 괜히 마주 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약간 내렸더니 내려간 옷 때문에 훤히 드러나버린 목이 보였다. 내려간 옷을 올려주려고 약간 잡아당겼더니 귀찮은 듯 팔을 들어 올려 내 위로 척 걸쳐버린다. 옷도 이불도 제대로 덮어준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얼굴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도 이불의 안온함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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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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