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예찬] 실수에 대한 이야기
highenough
2006. 1. 31. 01:02

왕가위 감독의 언젠가의 말인데..
춘광사설은 실수에 대한 이야기라고. 젊은 시절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실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내 감상은.
'실수라고 넘기기엔 대가가 너무 크잖아.' 였다.
그렇지 않은가.
실수라고 하기에는 개봉을 앞둔 영화제목처럼 사랑을 놓치는 거다. 죽을 만큼 아프게, 고통스럽게 그 사람과 끊어지는 거다.
그런데 그냥 실수라고.
네티즌 리뷰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다.(라이프로그 클릭하면 나오는 엔키노 페이지에 있습니다.)
보영은 아비와 루루의 아들, 아휘는 차우와 수리첸의 아들.
왕가위 감독이 워낙 자기 영화를 엮어서 엮어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2046에 가보면 이름도 같고 그러니까 일리 있는 말로 보였다. 더군다나 보영의 바닥닦기는 아비정전의 루루의 바닥닦기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는 지적, 진위를 떠나 고수라고 느꼈다. 역시 난 아직 멀었군.
제멋대로에 앙탈도 수준급인, 그러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보영. 아비와 루루의 아들이라고 해도 정말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심심하고 착한, 사랑에 상처받고 아프지만 그냥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아휘. 차우와 수리첸의 아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영화도 모르고(물론 지금도 모르지만;), 나이도 어리고, 사랑도 모르고(이것도 물론 지금도 모른다;), 두려울 것 없는 아무 것도 모르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난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이랬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쪽팔릴 만한 감상.(笑)
두 번째로 봤을 때, 난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놓치고 나서 사랑에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를 했다. 마치 버려진 양.
그 사람과 문제의 통화를 하고 나서는 울기는 커녕 헛웃음만 나왔어서 난 스스로의 사랑을 비웃었더랬다.
이다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인생의 5분의 1에 달하는 시간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이렇듯 단순하게 이 생각을 접어야 한다는 상황에 헛웃음으로 수용하고 말다니. 치열함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 감정에 비웃음만 비식비식 나오나보다 생각했다. 안 된다고, 당신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붙잡은 적도 없는 주제에 사랑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도 아깝다고 실컷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슬프지 않기 위해 온갖 개수작을 다 부렸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그 학기 학점은 굉장히 좋았다.), 쓰잘 데 없는 일에 올인 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사랑얘기-팬픽소재로 그 때 생각했던 것들 다수가 여기에 있다-를 생각해내느라 애썼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개수작이 실패했을 경우엔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를 했다. 그 사람을 세상에 다시 없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를 위로했다. 마치 복수라도 해야할 대상인 것처럼 그 사람을 나쁘게 만들고, 내 사랑을 무시했다.
그러고 춘광사설을 봤다.
신나게 비웃었던 내 사랑은 가시방석이 되어서 돌아왔다. 울지 않고는 못 베길 그런 가시방석이 되어서 돌아왔다. 어서 그냥 순순히 담담하게 솔직히 슬퍼하는 것으로 마감하라고.
폭포앞에서 수 없이 많은 물방울을 맞으며 선 아휘가 슬펐다고, 폭포에 둘이 함께 있는 모습만 상상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마지막에서 나는 그냥 슬퍼하기로 마음 먹었다. 조금쯤은 슬퍼해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그제서야 들었다. 조금 슬퍼하고 난 뒤에는 내 안의 그 사람을 그만 괴롭히고, 나를 그만 괴롭히자고.
다 슬프고 난 뒤에는 홍콩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도 사이좋게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가 없는 방에서 그렇게도 찾던 여권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도 떠나지 않고 담배를 쌓아놓으며 울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슬픈가보다.
보영이 아직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간다면, 보영은 이미 떠났다고 전해주면 좋겠다. 보영은 이미 떠나서 홍콩에 돌아갔다고. 아니면 아예 너무 슬퍼서 죽어버렸다고 해주면 좋겠다.
그딴 감상에 젖어서 아직도 청승 떠는 건 너뿐이라고, 보영은 이미 떠났다고, 값싼 감상은 집어치워야 한다고 깨우쳐줘서 그곳을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죽을 용기조차 없는 나는 죽지 않으려면 그곳에서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메이킹필름에서 이 처절하게도 슬픈 젊은 날의 실수를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고민했던 왕가위 감독의 모습을 보았다.
아주 아주 긴 시간 동안 홍콩의 정반대에 있는 곳에서 그는 젊은 날의 한 실수담을 가지고 고민했다.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런 걸 '미련'이라고 하는 건가보다. 바보 같지만 미련이라는 걸 간직하고 싶은 인간의 두 마음을 나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로 그냥 고민을 끝내버렸다.
이제는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기에는 고통에도, 슬픔에도 많이 무뎌져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