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嵐

[단편] Touch the Breath

highenough 2005. 11. 26. 04:05
[오노 사토시 생일 축하 단편]



BGM








대학 졸업 후 전공과는 지극히 무관하게 신문사에 취직한 나는 하필 소속도 전공과는 눈곱 만큼의 관련도 없는 문화부 기자가 되었다. 씁쓸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취업난이었다. 경기침체라는 늪에서 도무지 나올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끌린 듯 신문사에 입사원서를 넣었던 것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이 일을 막연히 기대했다는 이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다 잊고 살고 있었다고 스스로 놀랐을 만큼 익숙하고도 생소한 존재는 삶이라는 우연 속에서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8년, 아니 9년 전이었을까. 소신껏 건축공학과를 지원했던 나는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교양과목으로 엉뚱하게도 '교양 대중소설'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 때의 나는 문학이라고 하는 것들을 맨정신으로 10분 이상 읽어본 적이 없는 대책 없는 대학 새내기였다.












"필독도서 같은 거 말고 찾아 읽었던 책은 뭐가 있지? 남들한테 말하면 창피해서 혼자 몰래 보던 것들."





굉장히 젊어 보이는 교수의 질문에 주로 여학생들로 차 있던-그래봐야 15명도 채 되지 않아 보였지만-강의실의 짓궂은 남학생 한 명이 포문을 열었다.



"플레이보이요."
"그건 글보다 사진이 많으니까 아쉽게도 탈락. 그리고 그런 건 남학생들끼린 안 숨기잖아. 어머니한테나 숨기지."



질문한 학생이 오히려 나이가 더 많아 보일 정도로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첫 시간부터 바로 반말로 이야기를 꺼낸 그 교수에게 나는 조금 집중하게 되었다.



"할리퀸이요."
"고마워."



한 여학생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자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교수가 자세를 바꾸고 진행하는 태도가 변했다.



"그런 걸 흔히 뭐라고 하지?"
"통속소설이요."
"쓰레기요."
"대답 고마워.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연애소설."




별것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별것 아니었다.





"왜 쓰레기가 아니려면 심오해야 하지? 적당히 재밌고 슬프기도 하고 가끔은 비웃을 수 있는 정도로는 안 되는 걸까?"
"여기엔 안 된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교수가 어려 보였기 때문일까. 먼저 격의 없이 다가온 교수의 태도 때문일까. 첫 번째 강의는 폭소가 터지기도 하고 농담도 오가는 등 무겁지 않게 진행되었다.






"이제부터 매주 연애소설을 한 편씩 읽고 사랑과 연애와 섹스와 거짓말, 배신 등등.. 을 마음껏 잡담한다. 여학생이라고 수줍어 할 필요도 없고 남학생이라고 세 보일 필요도 없다."
"꼭 연애소설만 읽습니까?"
"아, 미리 양해를 못 구한 걸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교양 연애소설'은 개설이 안 된다고 해서 부득이 다소 왜곡이 있었다. 변경하는 건 자유지만 아마 다들 밀리고 밀려서 왔을 텐데?"





겉모습만은 여느 교수와 같거나 오히려 더욱 격식을 갖추었었다. 완벽한 정장차림과 약간 긴 머리, 검은 뿔테 안경은 조금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것들이 어떤 신조가 아니라 단순히 취향이라는 건 얼마 안 가 쉽게 알았지만 장난감 매장에 처음 와본 아이 같았던 나는 교수의 그런 점도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험은 없다. 그 대신 학기말까지 연애소설을 한 편 써서 낼 것. 분량은 내용이 너무 터무니 없지 않을 정도면 된다."





왜 그 때의 내가 그의 평가기준을 듣고도 수강철회를 하지 않은 것인지 지금에 와서 조금 후회해본다. 내 생애 그 과제를 낼 때 만큼 고민을 많이 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보통 공모전은 제출작품을 반환 안 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 강의는 특별히 냈던 작품을 반환해준다. 한참 지난 뒤에 꺼내보면서 마음껏 비웃을 기회를 특별히 주는 것이다."







나가면서 수근거리는 여학생들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말이 들리지만 않았어도 나의 관심사에서 그 교수는 그냥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재라더니 정말인가봐."
"사람들 압도하는 게 멋있어."
"18살 때 등단하더니 도쿄대에, 바로 교수까지 되고."
"그냥 작가나 할 줄 알았더니 대학 갔다잖아. 박사과정까지."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수강시간표에 있는 그 교수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그가 쓴 책을 모조리 빌려다 읽었다. 10분 이상 읽은 문학은 그의 데뷔작이 처음이었다.  뭐에 씌였던 것인지 밤새도록 읽어댔다. 등단한 작품으로 아쿠타카와 상芥川賞과 군조신인문학상郡像新人文學賞을 수상하면서 고교 3학년이었던 18세의 그는 일약 인기작가가 되었고 비상한 두뇌로 도쿄대에 가면서 다시 한 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학위도 착착 따낸 그는 바로 교수가 될 수 있었고, 그가 4년차의 교수일 때 나는 그의 학생이었다.









"소설은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데, 특히 연애소설이 실제 연애와 다른 점은 뭘까?"
"지나친 우연이요."
"삶도 우연이라고 우기면 우연은 어떻게 되는데요, 연인끼리 잘 되면 꼭 결혼하는 걸로 끝나는 건 진짜 좀 아닌 거 같아요."
"맞아요. 결혼해야 완성된다는 듯한 결말 진짜 싫어요."
"남자주인공들이 느끼한 대사만 해서 밥맛 없어요."
"여자들이 남자는 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고요."






실소를 터뜨리며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돌연 화살이 나에게 쏠렸다.






"마츠모토 군은?"
"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저만 아무 말도 안 하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재미있다는 표정이면서 아무 말도 안 하길래."
"그러면 안 되나요?"
"궁금해서 묻는 거야. 궁금하면 안 되나?"
"아닙니다."
"그럼 마츠모토 군은 뭐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하지?"
"연애소설은 꼭.. 사랑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연애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문학적, 예술적, 낭만적 두뇌와는 거리가 먼 나의 대답에 그가 보인 반응은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나를 도발했던 것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든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정말 사람일까?"






그 말을 하면서 안경 너머로 나를 도발하던 그 눈을 내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는 빙긋 웃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었다.









월요일 오후 마지막이었던 강의가 끝나고 그대로 혼자 앉아 있던 나는 오후의 사그라지는 햇살이 거의 그 기력을 잃었을 때쯤 정신을 차렸다. 순간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나고 동시에 나를 도발하던 그 눈이 생각났다. 그것은 나의 무엇을 도발하는 눈이었는지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적당히 여자애와 사귀어본 적은 있었으나 사랑이라는 건 스스로 나 같은 어린애는 아직 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그의 반응이 나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처럼 눈치 빠르고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요령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꽤나 어수룩한 녀석이었다. 정공법 외에는 알고 있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똑똑-





"네."





그의 작은 연구실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생각난다. 어째서 평소에는 전혀 없었던 일처럼 묻혔던 기억이 어떤 계기만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재구성되는 것인지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의 연구실이라는 곳에 처음 가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갔던 곳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1학기에 이런저런 심부름으로 전공 교수들의 연구실 등에 여러 번 갔었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굉장히 정신 없고, 더구나 문학 계열이니까 책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쓰러질 듯이 많이 쌓여 있을 줄 알았다.






책은 딱 벽에 둘린 책장의 수용량만큼 있었다. 어디에 더 쌓아 놓지도 끼워 놓지도 않았다. 그리고 상당수는 사전과 전집류였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나 철학가들의 전집들이었다. 전집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쓴 책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책상 근처에는 노트가 특히 좀 많이 있었다. 책상에는 컴퓨터 한 대와 전화기, 똑같은 종류의 펜과 지우개 달린 연필이 여러 자루 꽂힌 필통과 그 옆의 전동 연필깎이가 있었다.







"무슨 일이지?""






니체 전집이 꽂힌 책장 앞에서 책을 넘겨보고 있던 그는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말을 던졌다.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가 날 무시했다고 여겼던 것일까. 겁을 상실했던 건지 나는 그를 돌려 세워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그 때쯤 내가 늘 끼고 다니던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안경이 흘러 내려 그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과 부딪쳤다.








그 키스는..
순간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에 대한 앙심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순간에 내가 가진 느낌은 앙심에 더 가까웠다.





철썩-


당연한 일이지만 뺨을 얻어 맞았다. 내 안경은 보기좋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지?"






거기서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그 때 깨닫기만 했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굉장히 어이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이 비록 숨을 몰아 쉬고 있긴 했지만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옆 연구실의 다른 교수들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나를 도발하려는 것이었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뺨을 한 대 더 얻어 맞았다.
바닥에 주저앉게 될 정도로 제법 세게 맞아서 입술도 찢어졌다.






"대답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








뭐 하는 짓인지 내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말 없이 앉아 있던 내 앞에 그가 앉아서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충고를 덧붙였다.






"키스할 때는 안경을 먼저 벗기는 거다, 꼬마야."







안경을 벗은 눈을 보면서 어리둥절한 내게 그가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난 이미 그 길에서 퇴로를 모두 차단 당한 뒤였다. 어쩌면 그것은 나 스스로 차단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되돌아갈 생각 같은 건 갖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고급차를 타고 그의 고급맨션에 들어서는 내내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같은 비교적 유용한 생각들은 물론이고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게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가 먼저 샤워해도 좋다고 해서 먼저 샤워했고, 멍하게 침대에 앉아서 그가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었다. 여자랑 해본 적은 있는 거냐는 다소 무시하는 투의 말에 발끈하지도 않았을 만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어진 그의 말들은 전부 나를 도발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무시로 가득찬 말들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멍해 있었기 때문에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전달하려고 한 의도만은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 것은 그가 엎드려서 내 페니스를 입에 넣었을 때였다. 그의 말처럼 여자와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소위 오럴섹스라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태도가 변한 나를 눈치챈 것인지 페니스를 입에 문 채 피식 웃는 그가 느껴졌다.
갑자기 아까 전의 그 불쾌감이 솟는 것 같았다. 쾌감보다도 더 강하게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고 보니 이미 그는 잔뜩 발기된 내 페니스에 콘돔까지 공사를 마쳐놓았다.







"설마 콘돔도 처음 본 건 아니지?"







재밌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듯한, 나를 향해 조금 치켜 뜬 눈이 아까와 같이 지극히 무시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







"뭐 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해?"







그대로 조금 거칠게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당겨 키스했다. 남자와의 관계는 당연히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를 눕히고 샤워가운을 벌려 여기저기 애무했지만 정작 그 다음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는 나를 도발하는 데 성공한 그의 승리였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다.
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 해 애송이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그와의 섹스에 열중했다. 그는 이중적이게도 열심이었던 나의 애무에 신음을 터뜨리면서도 입을 맞출 때는 피식피식 비웃는 태도를 고수했다.
웃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턱을 잡아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는 대신 자신의 턱을 쥔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골반을 지나 내 손가락을 자신의 애널에 얕게 삽입 하고서 잠시 나를 밀어냈다. 조금 어리둥절한 나를 보면서 신음을 내뱉은 그가 다시금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말했다.






"여기다, 꼬마야."





그러더니 독특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약간 긴 손톱의 손으로 내 페니스를 잡고 삽입하는 것이었다.




"다 집어치우고 그냥 느껴봐."






그가 하는 말은 나에게는 종교와도 같았다. 따를 수밖에 없는 계명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렇게 하겠다 하고 자인한 적은 없었지만 나도 그도 암묵적으로 서로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제 마음대로 해봐."






말을 마치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고 내 목을 두르던 그의 옆모습이 바로 지난 밤의 모습처럼 되살아난다. 그의 말대로 다 집어치우고 페니스에서 느껴지는 그를 느끼다가 마음대로 해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그의 내부가 나를 감싸는 느낌이 그의 말 한 마디로 인해 너무나도 강렬하게 각인되었었다. 과격하게 움직이는 나 때문에 찌푸렸던 그의 미간이 아름다워 견딜 수 없었다. 음란한 신음을 내뱉던 입술이 경외로웠다. 그 때에 나는 그 한 번의 섹스로 그에게 중독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집에 안 들어가고 그의 침대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으며, 처음에는 책 한두 권 놓고 다니던 것이 옷이며, 칫솔, 속옷 같은 것들도 그의 집안에서 엄연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차피 그 큰 맨션에 그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들어갈 공간 정도는 얼마든지 있었다.







"안경 안 쓰는 쪽이 나은 것 같은데.."







All day long I dream about sex.
이것이야말로 그 당시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문장이다.



우리는 그 학기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심지어 방음이 열악한 그의 연구실에서조차 섹스했다.
하루는 그가 그의 침대에서 날 다짜고짜로 쫓아내기에 손님방으로 꾸며진 방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얼핏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그가 나신으로 들어와 내 위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은 모양새가 되어 마치 나에게 사랑이라도 구걸하는양 조심스럽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닥치는 대로 싸움을 걸어 나를 잔뜩 화나게 해서 그를 눕히기 직전까지 뺨을 맞은 적도 있었고, 추워지는 날씨에 나를 맨발로 현관 바깥으로 내쫓고는 새벽녘에 꽁꽁 언 나에게 펠라치오를 하기도 했다. 오른손을 쓰지 말기로 하고 어기면 깔리기로 정하고-물론 이기진 못 했다-섹스한 적도 있고 집으로 학생들을 초대해놓고는 샤워한다며 들어가서 물을 세게 틀어놓고 숨을 죽이며 섹스 하기도 했다. 일부러 만원인 전차를 타서 온몸을 밀착시켜 자극 해서 역 화장실 구석에서 섹스한 적도 있으며, 얇은 셔츠 한 장에 얇은 여름 바지만 입은 채로 바깥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나를 기다렸다가 따뜻한 욕조에서 꼭 함께 몸을 녹이며 섹스하기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는 섹스가 끝나면 반드시 긴 키스를 원했고 키스가 끝나면 침대에 앉아서 늘 니체전집을 달달 외울 듯이 읽거나 아주 오래된 재즈 음반을 들었다. 그러면서 언제나 말했었다.





"사정을 목표로 피스톤질이나 하지 말고 네 몸 전체가 느끼는 걸 순간순간 충실히 느껴. 사랑 따위 느끼지 않아도 행복 비슷해질 수 있을걸?"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 마디로 나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느 상황에서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 사람이 사랑'따위'라고 말했다.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그런 건 없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그냥 하는 거야. 왜냐면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불안하거든. 그걸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자기최면하는 거지."












그는..

표독스럽고 달콤했다.
한 없이 나약하고 잔혹했다.
신사적이고 거칠었다.
카뮈는 좋아했고 니체는 존경했다.
랭보를 좋아하고 셰익스피어라면 질색을 했다.
비틀즈는 닭살 돋는다고 하면서 디지 길레스피나 존 콜트레인이라면 아무리 비싼 음반이라도 절대로 사서 모았다.
커피는 중독에 가까웠고 담배라면 학을 떼었다.
정장 차림을 좋아하고 설명되지 않는 상황으로 고민하는 것을 죄악시했다.









그리고 나는..



불안해졌다.
내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져 있던 그 때 그가 갑자기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나는 당장 그가 없으면 곤란한데 그는 내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까봐 조바심이 났다.
우린 사귀는 것도 뭣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단순히 교수와 학생이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단지 미친듯이 섹스하고 꽤 같이 살고 있는 사이였다.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건 우스운 짓이었다. 아마도 서로 굉장히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나의 착각이었을 테지만 나는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거의 꿰뚫고 있었고 습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동 패턴이나 성격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파악하고 있었어도 내 예측이 빗나가는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그는 항상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순식간에 필요 없는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었다. 그래도 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 파악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나를 뛰어 넘었다.







아직도 그렇지만 나는 그런 느낌에 대해서 통 알 수가 없다. 그 때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나는 그런 비슷한 생각을 못 해봤다. 사귀었던 여자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간혹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틀렸어도 그런 건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개 그런가보다 했고, 틀리면 큰일 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건 그 순간에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 말이 그 순간에 상대방을 기쁘게 한다는 걸 다들 약삭 빠르게 알고들 있잖아? 그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소한 키스라도 더 달콤해져."
"근데 어떻게 그런 글을 써요? 사랑을 안 믿잖아요."
"사람들이 꿈꾸는 걸 그대로 담아내는 건 쉬워. 모두의 판타지를 글로 써낼 뿐이지."
"본인의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뭐, 말하자면. 누구나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잖아, 거짓인 줄 알면서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도."
"늘 그런 식이에요?"
"뭐가?"
"정확히 설명 안 하잖아요.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건 소설 밖에 없잖아요."
"설명하기 힘든 일을 설명하려고 매달려서 얻는 게 뭐가 있어? 그럴 시간에 차라리 키스를 한 번 더 하겠어. 원래 남 얘기가 더 하기 쉬운 거라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 늘 관찰한 이야기, 남의 이야기를 쓴다고 했다. 거기에 조금의 판타지를 첨가할 뿐이라고. 그 자신은 그저 사랑이라는 건 어떤 감정도, 진실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 하는 여러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감정도, 진실도 아니기 때문에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믿지 못 하겠다면서 멍청하게 시간만 보내느니 그 동안 딴 사람 하나 더 찾아본다고 했다.
어느 날, 나에겐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게 하고 섹스하는 내내 사랑한다고 속삭여준 그가 섹스 후에 내게 한 말이었다.








그를 좋아했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그를 지독히 좋아했었으니까..
절정의 순간에서 찌푸리는 미간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낼 수도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여러 각도로 그를 볼 수 있었던 그 때에 순간순간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도, 타이를 메는 손이나, 거울을 보면서 들어올린 턱끝도, 키스할 때만 볼 수 있는, 얼굴을 반은 가리는 안경을 벗은 그의 작은 얼굴도 전부 미치도록 좋아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사랑했었느냐고 묻는다면 곤란해진다.
사랑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때 내가 했던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학기의 중반 무렵에는 이미 난 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일본을 떠나 국비 지원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종강을 3주쯤 앞두고서였다.







"슬슬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네?"
"내가 내준 과제. 벌써 시작했어?"
"아니오."
"제대로 써내지 않으면 학점 어림도 없어."
"유학 가신다면서요.."
"아, 응. 근데 너 왜 맨날 안경쓰고 다녀? 안 쓰는 게 더 낫다니까.."
"모르겠어요."
"키스할 때는 벗으면서."
"그러게요. 가고 싶으세요?"
"뭐, 유학? 아, 뭐 재밌겠지. 나 가고나면 너 여기서 그냥 살래? 그래라, 그냥."








아무 대답도 않고 그냥 그의 안경을 벗겨버린 것은 어째서였을까. 키스를 하지도 않고 한참이나 그의 맨얼굴을 보고 서 있었던 건 왜였을까. 내가 한참이나 가만히 있자 내 안경을 벗겨버리고 키스해오는 그에게서 조금쯤 안심해버린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였던 걸까.





내 머리칼 속에 감겨드는 그의 손가락이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단순히 내가 그의 손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