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FlytotheSky

[연재] 만화가 vs. 소설가 (10)

highenough 2005. 9. 27. 03:11





(10) D-11




그가 일하는 하루 종일 동안 나는 DVD도 돌려주고, 가볍게 샤워도 했고, 그의 단행본을 읽거나, 서재에서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시시껄렁한 연예기사를 읽기도 했다. 결국 거실 코타츠에 앉아서 신문 모아놓은 통을 옆에 가져다 놓고 신문을 폈다. 실로 여기에 와서 처음 하게 된 다소나마 생산적인 생각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직 난 내가 무슨 얘기를 쓰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니까 말이다. 민규처럼 주변을 샅샅이 관찰할 능력은 없더라도 적어도 떠다 먹여주는 신문 기사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영화도 보고, 신문도 읽고, 사람들도 관찰하고, 책도 많이 읽었고, 음악도 많이 듣는 것 같았고, TV도 열심히 본다. 같이 살면서 배울 점이라는 건 그런 것들이겠지..





그냥 무작정 오늘자부터 일단 제목을 훑고 관심가는 제목이 있으면 읽었다. 그렇게 한 3일치 정도를 읽다가 문득 그냥 이렇게 보고 넘길 게 아니라 어디다 적어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가 선물해준 수첩과 필통을 가지고 내려와서 다시 오늘자를 펴고 날짜와 기사제목, 주요 내용을 기록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간혹 사진도 괜찮은 것들이 있어서 신문을 자를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데 뒷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서늘한 바람이 한 자락 들어왔다.





"ただいまです。"
"왔어.. 배 고파? 저녁 먹을까?"
"아니 좀만 있다가.. 바닥에 앉고 싶어서 혼났어. 난 만화가라는 사람이 책상앞에 오래 못 앉아 있고 말이지.. 의자는 막 엉덩이가 배기는 거 같아."





코타츠에 쏙 들어와 앉은 그가 내가 하고 있던 일을 보더니 슬쩍 웃는다.






"윤석 군 가만 보면 은근히 영화 흉내 많이 내는 거 같아."
"응?"
"지금 가위만 들면 딱 그건데, 영화.."
"무슨 영화?"
"스페인 영환데.. 음.. 나쁜 교육!"
"나쁜 교육? 그런 영화도 있어?"
"응! 그거 디게 유명한 감독이 만든 영환데 거기 남자주인공이 영화감독으로 나와. 근데 영화의 소재를 찾으려고 맨날 신문 보면서 스크랩하는 장면 나와."
"아아.."
"거기 영화에서 남자애가 문리버 부르는데 목소리가 진짜 맑고 예뻐. 저녁 먹고 보자."
"그래."
"가위 줘?"
"주면 좋고.. 근데 신문 잘라도 돼?"
"그러세요."
"어디 있어? 내가 가지고 올게."
"두 번재 책상 서랍에."





가위를 들고 나오니 그가 코타츠에 엎드려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곁에 쭈그리고 앉아서 조금 충혈된 것같은 그의 눈을 보면서 말을 붙였다.





"피곤해?"
"응.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으네. 그냥 늘어져 있고 싶어."
"저녁은?"
"모르겠어. 윤석 군 배고프지?"
"나? 난 뭐.. 배고픈가.. 그 말 듣고 보니 고픈 거 같기도 하고.."
"그럼 나 좀 일으켜주라."
"나 신경쓰지 말고 그냥 너 씻고 자도 돼."
"혼자 먹으면 싫잖아. 진수성찬을 먹는 것도 아니고.."
"진짜 괜찮아. 일으켜줄 테니까 씻고 자."
"제가 안 괜찮습니다, 황윤석 씨."
"네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고 하니까 뒤에서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켜주려고 했더니 무슨 스웨터까지 걸치고 있으면서도 간지럽다고 화들짝 놀란다. 그 바람에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킨 그가 뻗었던 내 팔을 잡고 지탱해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가볍지는 않은 걸로 봐서 남자는 남자다.





"너 이제보니까 통뼈구나."
"어?"
"말랐는데도 무겁네, 꽤."
"나 안 말랐어, 윤석 군. 그냥 적당해."
"말랐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내 허벅지가 얼마나 굵은데.."



식탁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을 끌어앉고 내가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는 양을 눈동자로 쫓던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인제 사야겠다."
"뭐?"
"반지의 제왕 DVD."
"그러고 보니까.. 좀 의외였는데.."
"뭐가?"
"반지의 제왕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빌리길래.."
"그게.. 확장판 세 편 묶어서 싸게 팔 때까지 기다리려고.. 여태 참았어."
"아줌마 같아."
"그거 다 샀는데 나중에 묶어서 할인 판매하는 걸 확인하는 기분이 얼마나 나쁜데-. 그래도 어제 보니까 인터넷에서 배송비까지 빼주고 싸게 팔더라. 내가 프렌즈 DVD 미리 사고 얼마나 후회했는데에-."



말이 길게 길게 늘어진다. 정말 피곤한가..



"옷도 아줌마 같은 거 입고.."
"아.. 이 옷.. 아주머니가 뜨개질도 하시거든.. 근데 당신 입으시려고 떴는데 작다고 나한테 주셨어. 핸드메이드 판쵸지. 근데 덕분에 여미는 부분이 반대 방향이야. 뭐 상관 없지만.."
"잘 어울려."
"고마워."



발끈했다가도 다시 느릿느릿 띄엄띄엄 말하는 그를 놀려주고 싶어서 잘 어울린다고 한 마디 더 붙였는데 마음에 드는 대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 비실비실한 게 다시 감기가 도지는 건가..



"오늘은 왜 이렇게 피곤해?"
"아, 응.. 어제 논 만큼 다 하느라고.."




쑥쓰럽게 피식 웃으면서 말하더니 무릎에 피곤한듯 눈을 부볐다.




"엄격하네."
"응, 좀. 그냥 소심한 거지 뭐.."




다시 피식.
왠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다.




"결벽주의도 안 좋아."
"그렇지, 확실히.."





후후, 하고 웃는 그의 앞에 그릇이며 빵을 놓으면서 말하는데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내가 뭐라고 그에게 충고를 하고 있는 건가. 나야말로 그의 충고를 매일같이 들어도 모자랄 판에..




"커피 마시고 싶다."
"줘?"
"아니. 마시면 못 잘 거 같아."
"빵 뭐 발라줘?"
"버터잼. 헤헤.. 오늘 서비스 좋네.."
"내가 너랑 똑같은 표정 지어볼까?"
"내가 그렇게 불쌍한 표정이야?"
"응. 자.."
"고마워요. 戴きます。"





그가 좋아하는 빵집은 독일식 빵을 만드는데 그의 대량 구매 품목에 포함될 수 없는 관계로 매일 점심 먹으러 나갔다 돌아오면서 조달하고 있었다.




"여기 사장님들 진짜 수다쟁이야."
"응. 기운빠지는 거 같기도 해.."
"그 정도야? 윤석 군은 수다떠는 거 싫어하는구나.."
"여러 사람 상대로 장사하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남자 두 분이서 단골손님 왔다고 그렇게 말 많은 건 좀 놀라웠어."
"그렇긴 하지?"



빵을 절대 입으로 베어 먹지 않고 손으로 조금씩 뜯어 먹는 그가 또 다시 보는 사람의 기운이 쪽 빠지는 웃음을 보였다. 우유를 마시는 그가 진심으로 조금 많이 걱정되었다.



"얼른 먹고 자."
"아무래도 안되겠어."
"뭐가?"
"커피 마실래."




축 늘어져 있던 그가 일어나서 커피 내릴 준비를 하고 섰다.




"영화도 보자. 윤석 군 커피도 내릴게, 같이 보자."
















"저 애 목소리 진짜 예쁘지?"
"어. 근데 저 신부 완전 눈이 이글이글 타는 게.."
"완전 사이코지.."




간단한 설거지를 마치고 나왔더니 그가 DVD를 찾아 넣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코타츠를 가까이 끌어다 커피 머그를 두 잔 올려놓고 코타츠 속에 다리만 쏙 집어넣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옆으로 와 앉으라고 자기 옆 방석을 톡톡 쳤다. 말이 앉았다뿐이지 그는 사실 약간 앞으로 기운 자세로 앉아서 영화를 보던 여느 때와 달리 허리를 쭉 빼고 반쯤 누운 상태였다. 커피 머그를 쥐고 배 위에 올려놓더니 배가 따뜻해서 좋단다.





"커서는 좀 아니.. ㄴ데.."





영화가 후반이 되고 미소년이었던 주인공이 성장했을 때의 모습이 나오는데 꽤 실망스러운 모습이어서 그를 봤더니 머그를 꼭 쥔 채로 자고 있었다. 이대로 자는 건 안되겠다 싶어서 일단 머그를 빼내려니까 선잠에서 깼다.




"들어가서 자."
"들어가기 귀찮아."
"자리 깔아줄게, 들어가서 자."
"응.."




언제는 커피 마시면 못 잔다더니 내려놓은 커피는 얼마 마시지도 못할 정도로 졸렸던 거였다. 아무리 어제 안 한 만큼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지치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기력을 다 쓸 만큼 에너지를 쏟았다는 건가..

그의 방에 자리를 깔고 나왔더니 그는 아예 반쯤 엎드린 자세 방석 위에서 자신의 손을 베고 자고 있었다.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며칠 전엔가 그가 말했던 그 긴 머리를 넘겨보았다. 이마가 드러나면 훤하게 더 잘생겨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깨워야 하는데 들어서 옮기는 건 영화에나 있는 장면이고..



평온하게 자고 있는 그와 달리 영화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게다가 꽤 민망한 장면까지 나온다. 이런 걸 같이 보자고 하더니 먼저 자버리다니 그가 약은 거라고 해야할지..

영화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손이 저릴 것 같아서 일단 베고 있던 손을 빼고 방석을 한 번 접어서 넣어주었다. 코타츠라면 춥지는 않을 테지만 이대로 올라가서 혼자 편히 잘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근히 고집 세네.."




그의 방에서 베개와 이불을 꺼내와 베개를 괴어주고 코타츠로 안 덮히는 부분을 덮어주고 나서 베개만 하나 더 꺼내왔다. 아예 코타츠를 들어서 옮기고 그가 누운 방석 옆 바닥에 누워서 이불을 나눠 덮었다. 방석에 옆얼굴이 약간 가려진 그가 보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인다.


만화가라서 그런가..
그거랑은 상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