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FlytotheSky
[연재] 만화가 vs. 소설가 (9)
highenough
2005. 9. 20. 22:33
(9) D-12
"아우.. 도저히 안 되겠다. 윤석 군, 뭐해?"
글쓰고 싶을 때는 서재에서 데스크탑을 써도 좋다는 그의 말에 오늘은 오전에 가볍게 환기와 함께 아침 일찍 차에 실어온 그의 팬레터들을 가볍게-는 아니지만 어쨌든-정리한 뒤 겨우 책상 앞에 앉은 참이었다. 빼꼼 열린 서재의 문으로 그가 고개만 내밀고 꺼낸 말은 사뭇 의외랄까.
"그냥. 컴퓨터 성능 검사."
"응?"
"켜봤어, 그냥. 뭐 있나, 하고."
"앗, 내 일기같은 건 보지 마."
"알려줘서 고마워."
"에- 어차피 반은 일본어다, 뭐."
그는 서재로 들어와서 책상으로 터덜터덜 들어오더니 책상 위에 턱만 괴고 나를 옆으로 올려다보면서 대화를 이었다. 마치 연기하는 것같은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아이같이 삐죽거리는 입술을 보면서 괜히 혼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내 멋대로 그에게 완벽의 이미지를 끼워놓고 의외라고 여기고 있었을까. 오히려 일이 아닐 때에는 과하다 싶게 순진한 그인데..
"나 아이디어 고갈 상태야, 윤석 군."
"그럴 때도 있어?"
"당연하지, 나도 사람인데! 왜, 난 외계인인 줄 알았.. 냐?"
"정말? 난 외계인인 줄 알았.. 지."
동시에 나온 말. 동시에 터진 웃음.
미안해 했으면서도 고치지 않는 미련한 고집.
"어쨌든 나 오늘은 아무 것도 못해. DVD 빌리러 가자."
"어? 이 옆에 진열된 DVD도 많은데 또 빌려?"
"빌려본 다음에 사는 거지. 좋은지 어떤지 모르는데. 가자, 얼른."
"OK."
역시나 약간 썰렁해 보이는 그의 차림이 걱정되는 가운데 3월초 치고는 꽤 보드라운 날씨다. 그래봤자 그는 감기 중이라서 전혀 따뜻한 날씨라고 안심할 만한 처지가 못 된다. 보기에 전혀 따뜻해 보이지 않는 얇은 면따위인 회색 목티에, 회색 카디건에, 회색 목도리를 두르고 심지어 아래에다가는 까만 청바지를 입은 그는 명백히 추워 보인다. 게다가 꽤 자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기침. 저래서 그림은 잘 그릴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너 장갑은?"
"장갑? 3월이야, 윤석 군."
"3월이건 뭐건, 춥잖아. 나중에 DVD든 비닐봉지 맨손에 들면 손 얼마나 시린데.."
"윤석 군이 들어주겠지, 뭐."
"누가 들어준대?"
"그럼 쫓아내지 뭐.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잘나가는 만화가라고 밥값도 못 하는 문하생을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받아주냐."
"내가 졌소."
"그럴 줄 알았어."
도대체가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다.
혹시 처음부터 인간 세상의 말싸움에도 천적 관계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일까?
"윤석 군도 골라봐. 나 오늘 하루 조옹일 DVD만 볼 거야. 피자 시켜 먹고."
"흠.. 그럴까.."
뭘 찾아야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휘휘 둘러보는데 낯익은 제목에 눈에 확 들어왔다.
"어, 이거 오랜만이네."
"뭔데, 뭔데?"
"워크투리멤버."
"a Walk to Remember? Mandy Moore네~"
"아, 응."
"나 맨디 좋아하는데 이거 왜 안 봤지? 이거 무슨 내용인데?"
"아, 그 여주인공이 시한부인데.."
"그래서 안 봤구나.."
"어?"
"아, 그래서 안 봤다고. 사람 죽는 영화 안 봐."
"너 인썸니아도 보고 그랬잖아."
"그렇게 누가 죽이거나 하는 거 말고. 아파서 죽는 거.."
어깨를 한 번 크게 으쓱하더니 뭐라 표현할 길 없이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표정으로 그는 억지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지만 그는 다시 웃어보이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근데 의외네, 윤석 군. 그런 영화도 봐? 게다가 기억도 하고.."
"이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왜?"
"우리 동기 중에 직장 생활하다가 학교 온 누님이 계셨거든.. 근데 그 누님이 이 남자주인공 좋다고 남들 다 월드컵에 열광할 때 혼자 이 남자한테 열광하고 다니면서 동기 남자애들한테 이 영화를 강제로 보여주는 거야."
"이 남자?"
"응. 아마 이거 나온 게.. 어, 2002년인데.. 2002년에 헐리우드 섹시가이 20위 안에 들었을걸.."
"이 사진은 둘 다 영 아닌데..?"
"글쎄 말이야.."
"반지의 제왕 확장판 세 편 다 빌려 볼까? 그러면 하루 다 지나겠지?"
"그거 원래도 3시간 넘는데 확장판은 더 길다며. 10시간은 너끈히 지나가겠네."
"그렇지. 따로따로 볼 때는 재밌었는데 10시간 넘게 봐도 재미있을까."
"그럼 나는 고를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
"그렇네. 그럼 딴 거 볼까?"
"됐어.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었는데 뭐."
결국 반지의 제왕 확장판 1, 2, 3편이 모두 든 비닐봉투를 그의 예상처럼 내가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다 안 봤어?"
"다 봤지."
"근데 또 봐?"
"재밌잖아. 재밌고 상상력 풍부한 거 보면서 시간도 잘 가고.."
"바쁘지 않아?"
"음.. 아직은 여유 좀 있어. 그리고 어차피 능률 안 오를 때는 붙들고 있어봐야 소용 없어."
"그래도 이거 다 합치면 진짜 10시간도 넘어."
"사실은 그게 주요 목적이지."
"시간 보내는 게?"
"응."
"왜?"
"모르겠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날 때는 빨리 오늘이 지나가버려야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어렵네."
"그치.. 나도 어려워."
매사 확실해 보이는 그였지만 이렇게 불확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글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조금은 뿌듯한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피자 시켜 먹을까? 한 판 시키면 두 판 오는 데 도전해볼까? 맨날 나 혼자 있으니까 그런 데 있어도 소용 없었는데 윤석 군 있으니까 시켜보고 싶어."
"난 아무 거나 괜찮아."
"진짜지? 그럼 페퍼로니 피자랑 양송이 피자로 시켜볼까.."
"이왕이면 펩시로 주는 데에다 시켜."
"OK."
"코카콜라밖에 없으면 레몬이나 라이트로."
"콜라 취향 복잡하시네요."
"그냥 코카콜라는 싫어. 너무 달다 못해서 써."
"알았어요, 알았어."
"쓴 건 좋지만 달다 못해 쓴 건 싫어."
"어? 쓴 건 좋아해?"
"어. 특히 초콜릿은 쓴 거 아니면 안 먹어."
"나도. 대체 사람들은 쓰지도 않은 초코렛을 무슨 맛으로 먹는대?"
"그러게. 난 너무 달면 입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던데.."
"맞아, 맞아. 단 거 잘 먹는 사람들이 어떨 때는 존경스럽다니까."
잠시 흥분하면서 쓴 초콜릿의 맛과 단맛에 대한 비호감으로 열변을 토하던 우리는 문득 둘 다 필요 이상 목소리가 높아져 있어서 웃음이 터졌다. 같이 떠들어 놓고 서로 네가 시끄럽게 해서 그렇다고 떠밀면서 말이다.
"근데 질문 하나 해도 돼?"
"뭐? 신체 사이즈만 아니면 다 대답해줄게."
"안 재밌어."
"뭔데?"
"그냥.. 윤석 군은 국문과라고 했지?"
"어."
"국문과도 전공이 또 나뉘지 않아?"
"나뉘지."
"윤석 군 전공은 뭐였어? 역시 소설인 건가.."
"아, 그게.. 사실은 소설하려고 했는데.. 선배들이 시 하는 게 더 쉽다고 그러더라고. 다 사기였지만."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 시 전공?"
"뭐 소설도 수업 듣긴 했지만 논문은 시로 했었지."
"의외네. 그래서 저번에 그렇게 술술 외웠던 거구나.."
"그렇지, 뭐."
"근데 왜 사기야?"
"시라는 게 은유나 그런 게 많잖아. 해석하기에 따라 제각각이고.."
"원래 다 해석하기 나름인 거 아니야? 국문과에선이론적인 뭔가가 있는 거야?"
"그게 문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해석이냐 아니냐도 말이 많은데다가 섣불리 새로운 해석 내놓으면 또 난리 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골치 썩는 거지 뭐."
"복잡하구나, 역시.."
"그나마 고전시가가 낫지, 현대시는 정말 토나와."
"고전시가? 그게 뭐야?"
"옛날 시나 노래. 뭐 시조같은 것들도 포함되고.."
"아, 시조는 알아. 근데 그게 더 쉽다고?"
"지금 쓰는 말이랑 달라서 그렇지 오히려 그 쪽은 규칙만 알면 해석하기도 쉽고 표현하려는 게 확실하니까 좋아. 현대시는 읽는 데 무리만 없을 뿐이지 골백 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게 얼마나 많은데.."
"헤에.."
"천재라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을 꼬아 놓는지.. 그냥 딱딱 알아먹기 쉽게 쓰면 누가 혼내는 것도 아니고.."
"흥분했네, 윤석 군."
그에게 말을 하면서 정말 선배들에게 사기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목에 점점 힘이 들어갔나보다. 쿡쿡 웃는 그가 재밌다는듯 쳐다봤다.
"전문가 같아서 멋있다, 윤석 군."
"그러면 뭐 하냐. 현재 백순데.."
"꿈이 크잖아. 그러려고 열심히 하고 있고.."
"잘 돼야지, 잘.."
"잘 하면서, 뭘.."
칭찬이야 고맙지만, 그렇게 치면 넌 맨날 전문가 같잖아.
"윤석 군, 아이스크림 사가자."
"그래."
"아니다. 반대방향이니까 나 혼자 갔다올게. 먼저 들어가 있어."
"같이 가. 너 춥잖아."
"나 안 추워. 그리고 뭐 윤석 군이랑 같이 가면 추울 게 덜 추워?"
"당연하지. 누구처럼 고거 잠깐 춥다고 손이 빨개져서 보는 사람 손이 다 시렵진 않거든."
"에-."
"손 시리지?"
"안 시려워!"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손이 빨개져서 안쓰러웠다. 로션을 잘 바르는 건지 손이 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잠시도 손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움직인다. 손가락 운동이라나.. 사실은 그 와중에도 혈액순환이 나쁜 건지 집이 춥지도 않은데 전기 오르게 할 때처럼 손이 새하얗게 되어 있을 때가 많지만..
"え-。気持ち悪いい。"
"응?"
"징그러."
"뭐가 징그러. 시뻘건 네 손이 더 징그러."
"뭐야! 하프갤런도 윤석 군이 들어."
"네, 사모님."
"안 재밌어."
"알아."
"윤석 군!"
그와의 말다툼-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에서 처음 이겨보는 것 같다. 아직도 내 면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려고 애쓰는 그의 얼굴이 분해서 그런지 빨개진 것도 같다.
역시..
의외로 단순한 구석이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