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嵐

[연재] 月暈 (4)

highenough 2005. 9. 16. 13:06

(4)



"오노 군, 하얀 센스 어울릴 줄 알았어요!"
"고마워, 마이 쨩."




직접 골랐다는 새하얀 센스에 마이는 굉장히 만족스러워 했다. 오노로서는 히타타레가 어색했지만, 입고 보니 혼례날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노 군, 신부 마중 나갈 건데 같이 가요."
".. 응."



쾌활한 성격의 마이는 오노를 앞질러 빠르게 걸어갔고 오노는 쇼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정 쪽 조카라는 작은 소년과 함께 안채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오노 군, 제 조카예요. 오노 군보다 세 살 아래입니다."
"마츠모토 쥰松本潤 입니다."
"오노 소타로입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시선을 앞서 간 마이에게 돌린 오노를 어린 마츠모토는 잠시 그대로 보았다. 자신의 이모로부터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설명은 들었지만 도무지 보기만으로는 제대로 시선도 못 맞추는 말라빠진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아직 올리지 않았고.





"이제 곧 당도합니다."
"고맙네."




시종이 고하자 대문 앞에 멈춰선 일행은 가마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닿은 가마의 행렬에 오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가의 혼사도 아니었다. 자신은 제3자였다.




"고생했구나. 들어가자."
"네."



쇼의 어머니가 말을 꺼내고 비켜서 오노와 마츠모토의 사이로 쇼의 어머니와 신부가 걸어가고 그 뒤를 오노와 마츠모토, 시녀들이 따랐다.








어지러운 시대였다. 남자들은 싸움과 싸움에 힘썼고 무사들이란 그 목숨을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염의 혼례란 그림의 떡과 같은 것으로 신랑의 집에 있는 신당에서 신부를 맞아들이는 예식과 연회만 겨우 할 뿐이었다.



예식이 끝난 후 연회가 베풀어질 곳으로 향하니 다른 사람들은 꽤 모였는데 쇼와 슌만 보이지 않았다. 마츠모토가 시종에게 물으니 슌의 방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누구도 들이지 말라했다고 했다. 나이가 어린 탓에 오노와 마츠모토는 연회장의 문가에 나란히 앉았다. 어려서 어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달리 나눌 대화도 없던 두 사람은 그저 앉아 있기만 했다.





"이모님께 대충 전해 듣긴 했지만.. 오다이님과 함께 오셨다고.."
"네."
"그럼 그 전에는.."
"그 전에는 노부모토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슌의 방에는 시로무쿠白無垢를 입은 쇼가 시선을 앞에 놓은 혼인에 길하다는 흰색의 박箔이 들어간 자색 센스 끝에 고정하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되었으니 수련에도 더욱 힘쓰기 바란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학문에도 더욱 정진하고."
"예."
"특히.."



슌은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인간은 인간과 살아간다. 아내와의 일이든 동무와의 일이든 말이다."
"알겠습니다."
"손님들 기다리시겠구나, 어서 가자."




슌이 몸을 일으키자 쇼도 따라 나섰다. 넓은 연회장에 연회를 주재할 상석의 옆문으로 들어서니 시녀 한 명이 신부를 모시러 나갔고 무표정한 얼굴에 어깨를 떨어뜨린 쇼가 센스를 허벅지에 탁탁 치며 들어왔다. 자신과 상관없는 동떨어진 상황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던 쇼는 연회장에 두 사람이 들어오자 집중된 시선과 쏟아지는 시끄러운 축하 인사에 불현듯 정신이 들어 눈에 초점을 다시 맞췄다. 그렇게 든 시선에 연회장 구석에 앉은 마츠모토와 오노가 보였다. 마츠모토는 자신에게 입모양으로 '어이.'하고 부르는 것 같았고, 오노는 가끔 정원을 내다보며 노래를 부를 때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모든 사람이 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렇게 멍하게 앉아 있다. 그런 주제에 오노는 어젯밤에 자신의 혼인을 축하한다고 말해줬었다. 그 때는 잘 보지 못했지만 본인이 애써서 피해 다닌 그 두 달 동안 그는 많이 여윈 듯 했다. 젓가락을 든 손을 보면 상처에 감았던 붕대는 푸른 모양이었다. 보일 리가 없는데도 상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괜시리 자신의 손이 베인 듯이 저려왔다.




"무엇 하느냐?"
"아닙니다."




쇼가 자리에 앉자 이윽고 방금 쇼가 들어온 문의 반대편 문으로 신부가 화려한 이로우치카케色打掛를 입고 조심조심 걸어 들어와 앉았다. 이전에 몰래 가서 보고 온 적이 있었던 터라 오늘 처음 만난다고 해서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듣던 소문대로 근방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미인이었다. 아직 몇 마디 들어보진 않았지만 목소리도 고왔고, 곁에 있을 때의 향기도 좋았다.





"다 같이 건배합시다!"
"사쿠라이 쇼 군의 혼인을 축하하네!"
"축하하네!"




모두 잔을 들고 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쇼는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오노가 저런 바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의 마츠모토의 뒤로 보여 어떻게든 눈을 맞춰보려 했지만 오노는 잔을 든 채로 여전히 자신의 쪽은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모두 잔을 내렸는데 오노만이 멍하게 잔을 든 채로 멈추어 있었다. 연회장 안이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데도 쇼의 눈에 그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마츠모토가 톡톡 건드리자 멍하던 표정을 지우고 멋쩍은 듯이 웃는 오노를 계속 보면서 쇼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웃기나 하고.. 정신은 어디다 빼놓고 사는 거야, 대체.."

























"마츠모토 군, 저 지금 먼저 일어나려고 하는데.."
"네?"
"간밤에 잠을 설쳐서 일찍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여긴 숨도 못 쉬겠어요."






마츠모토와 오노는 조용히 일어나 자신들의 바로 옆에 있던 문으로 나갔다.










"아마 한동안은 방으로 안 오겠지요? 좋을 것 같아요, 혼인도 하고 어른 대접도 받고.."





어린 마츠모토의 말에 몇 번이고 생각을 해봤던 일이라고 해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다짐한 것보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확인받는 것이 몇 배나 더 씁쓸한 것인지 오노는 지금 막 깨달았다. 뜬 구름같은 감정의 조각들은, 타인의 말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소리로 인해 작은 호흡만으로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오노 군, 우는 거예요?"
"아, 상처가 갑자기 욱씬거려서.."





그새 눈물이 맺혔던 것인지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마츠모토에게 오노는 둘러대기 위해 손바닥을 보였다.




"아팠겠어요. 무슨 일로 이렇게.."




짙은 눈썹에 동글동글 귀여우면서도 쉽게 기억에 남을 강한 인상, 아직 어린 나이에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와 다르게 마츠모토는 굉장히 다정하다고 오노는 생각했다. 사촌 간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이렇게나 다르다고..






"앗, 마츠모토 군."
"네?"
"저 아까 그곳에 센스를 두고 왔어요.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안녕히 가세요."
"오노 군도 안녕히 가세요. 다음번에는 꼭 한 수 가르쳐줘야 돼요."
















마이가 준 센스를 찾으러 돌아간 연회장에 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노는 의아했지만 잠시 소피라도 보러 갔으려니 생각하고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방문 앞에 쇼가 앉아 있었다.






"마츠모토랑 뭐 했어?"
"네?"
"하여튼.. 그러니까 맨날 외우지도 못 하고 그 모양이지! 빨리 들어와!"
"저.. 저기.."
"안 그래도 머리 나쁜 게 말도 안 듣고.. 들어오기 싫으면 말아라. 난 들어간다."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선 오노가 빨리 불을 밝히라는 쇼의 성화에 서둘러 불을 밝혔다. 급하게 하나만 밝혀서 연회장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으스름한 불빛에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돌아가셔야 되지 않아요?"
"몰라. 거기 시끄럽고 귀찮아."
"쇼 군.."
"뭐해. 빨리 불 좀 더 켜봐. 이렇게 해서는 글자가 안 보이잖아."






오노는 스스로도 쇼가 이런 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쇼가 하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쇼가 하는 말에는 꼼짝할 수 없었다. 도장에서의 저항이 처음이었다. 오노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쇼는-방에 함께 들어온 적이 없었으므로-여느 때와 달리 개켜 올려진 자리까지 직접 깔고 옆으로 팔을 괴고 누웠다. 그러고는 다가와 앉은 오노에게 마치 두 달 전처럼 구박을 섞어가며 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걱정되는 마음도 억지로 누르고 긴장한 오노는 잔뜩 굳었고 꽤 긴 시간 동안 공들여 쓰기를 마친 뒤 허리를 펴자 쇼는 팔을 괸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던 듯 잠든 쇼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ㅅ.. 쇼 군.."






아직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 했으면서도 오노는 베개를 가져다 괴인 팔을 빼고 쇼를 바로 뉘었다. 아직 새하얀 시로무쿠를 입은 채인 새 신랑 쇼는 엉뚱하게도 남의 방에 와서 잠들어버렸다. 새벽에 깨워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오노는 쇼가 누운 자리 옆에 여분의 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아직도 그 날의 자신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고, 그 날의 쇼의 말도 다 알아듣지 못 했고, 이렇듯 갑작스러운 쇼의 태도변화를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도 몰랐다. 다만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잠든 쇼를 숨죽여 지켜보다가 잠에 빠져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