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대체 요새 왜 이런 것들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창의력 테스트라는 것을 했어요.
근데 그 결과라는 것이..
-┌
우울, 소심, 집요한 수도승 형
창의성 14점 폐쇄성 70점(삐질;)
이런 창의력으로 팬픽 씁니다, 제가.역시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엉엉)
- 특징
당신은 규칙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남들보다 조금 심하게 규칙적이다. 그것이 당신의 창의력의 원천이다. 남들은 쉽게 넘어가는 사실들을 당신은 쉽게 넘기지 않는다. 남들이 저지른, 자신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들도 당신은 하나하나 기억한다. 사람들이 언제 규칙에서 벗어나는지, 언제 다시 돌아오는지 당신 눈에는 보인다. 당신은 규칙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 장점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빈틈을 발견하는데 당신만한 사람이 없다. 그게 당신의 창의력이다. 당신의 사고방식은 상식적이지만 너무나도 대단하게 상식적이어서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당신은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 그 능력을 잘 개발하라. 그리고 당신에겐 창의력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꾸준함과 지구력이 있다.
- 단점
당신의 규칙은 남들과는 좀 다르다. 그래서 갈등을 많이 겪는다. 주변으로부터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당신의 고집은 장점이지만 너무 고집만 부리다간 친구도 별로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이 괴롭게 살수도 있다.
- 조언
당신은 한가지 주제를 잡아서 꾸준히 파고드는 삶이 적성에 맞는다.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마 넘지 못할 벽은 없을 것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당신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하고, 창의적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 단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융통성이다. 귀찮더라도 사람들을 사귀고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도..
당신과 비슷한 인물들에서 잠시 힘을 얻었습니다.
- 박경리
1927 생. 25년 동안 쓰여진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작, [토지]의 작가. 개인사에 치중했던 여성 작가의 틀에서 벗어나, 그 어떤 작가보다 깊고 장엄한 민족적 색채의 작품을 많이 남김. 번득이는 아이디어보다는, 깊고 짙은 스토리 구성력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 받음. 개인에 대해, 민족에 대해, 인류에 대해, 자연과 지구에 대해, 이렇게 수십 년간 자신의 창작과 철학의 폭을 넓혀온 박경리는 오늘날 한국의 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생존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 있음.
증오와 절망, 그리고 고독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을 살았던 박경리의 유일한 낙은 문학이었음. 책을 미칠 정도로 좋아해 남의 책을 빌려 밤새 읽고 돌려주곤 했음. 하루 밤에 책 세 권을 독파하고 다음날 눈이 시뻘겋게 된 적도 많았음.
학창시절의 자신을 평범하고 공부를 못했던 아이로 묘사함. 대신 독서와 시를 쓰는 일에 매달림. 그에게 시는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준 버팀목이었음.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 아버지는 박경리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나가 딴 살림을 차렸음. 진주여고를 다닐 당시 학비를 보내주기로 했던 아버지가 "여자가 뭐 하러 공부를 하나, 시집이나 가지"라며 약속을 어기자 찾아가 이렇게 따졌다고 함. "당신이 공부시켰어요? 그만두라 마라 할 수 있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1945년 진주여고 졸업.
그런 아버지와 결혼해 굴욕적인 삶을 살았던 어머니도 경멸했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박경리에게 불합리한 남성 권위에 대한 저항심을 심어주었음.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그러나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6.25 때는 실종(월북으로 추정), 전쟁 후에는 아들마저 사망. 이때부터 가족은 어머니와 딸 아이 하나만 남았고, 이들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져야 했음.
평화신문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역임. 4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 1955년 [계산]과 [흑흑백백]으로 등단.
1960년 4.19 의거를 경험. 그간 개인적, 가족적 고통 중심이었던 인생관이 민족 전체로 확대됨.
1962년 [김약국의 딸들] 발표. 그간의 자전적 시점에서 벗어나 민족적, 인류적 보편성을 다룸. 이 소설은 박경리 문학성이 극대화 된,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음.
1969년 [토지] 집필. 원래 [토지]는 현재의 방대한 분량으로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었음. 외할머니에게 들은 얘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으로 쓰기로 했던 작품이었으나, 집필 과정에 이야기가 가지를 치기 시작, 이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넣게 됨. [토지]를 집필하는 동안 전화도 끊고 신문도 끊고 원고 청탁도 일체 받지 않은 채 오직 한 작품에만 집중하는 투혼을 보임. 도중에 생계 문제 때문에 [현대문학]에 소설을 연재하기도.
고통스러운 창작은 25년간 계속되어 1994년에야 끝남. 원고지 분량 3만1200매. [토지]는 집필기간과 양에서 단연 한국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됨. 토지를 탈고한 원주시 단구동 집은 1997년 문화계 및 지역인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토지문학공원으로 영구보존 됨.
[토지]는 1979년과 1989년 K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됨. (당시 토지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마화 됐음에도 엄청난 반향으로 일으키며 박경리를 스타 작가로 만들어 줌.) 2005년 [토지]는 세 번째로 S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됨.
낯가림이 무척 심한 편. 인터뷰 요청이나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 그간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 SBS 토지 드라마의 제작이 결정되고 길상 역을 맡은 유준상이 박경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래서요?"라는 대답이 전부였음.
딸인 김영주는 시인 김지하와 결혼. 김지하는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화 관련 집필 활동으로 투옥돼, 박경리가 그의 아들(손주)의 뒷바라지까지 도맡음.
말년에 생명 환경 사상에 심취, [계간지] 숨소리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강의나 인터뷰 때에 환경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주제로 삼음.
어록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작가는 얼굴이 필요 없다. 작품을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다. 문학작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가 읽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평가하면 된다. 작가가 이러쿵저러쿵 해명하는 것은 작품이 미진하다는 뜻이다… 내 작품을 읽고 마음대로 상상하면 된다."
"나는 전쟁 미망인이었다. 불행의 상징이다. 가난하고, 애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소망이 있기에 써온 것이다. 불행에서 탈출하려고."
"우리가 잊어서 안 될 일은 생산고만큼, 부를 축적하는 만큼 지구는 망가져 간다는 것이다. 경제력으로 공기를 살 수 있는가? 경제력으로 오염을 막을 수 있는가? 경제력으로 뚫린 오존층을 꿰맬 수 있는가? 불필요한 것의 생산고를 낮추어야만 인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음악의 성인"으로 추앙 받는 독일 본 출신의 작곡가. 불우한 어린 시절, 고통스러웠던 연애, 힘든 사회생활, 청각 장애, 가족의 배신 등 감내하기 힘든 역경을 초인적인 의지로 견디며 인류 사에 길이 남을 음악을 창조한 위대한 예술가. 그는 사회적 관계에 여러 차례 실패한 뒤 극도로 폐쇄적인 성품으로 발전했으며, 창작을 할 때에도 고통스러울 만큼 디테일에 집착하는 등 정신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아동학대 수준의 스파르타 식 음악 교육을 받으며 자람. 이런 혹독한 교육 속에서 그는 모짜르트로부터 "앞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을 음악가"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임.
부모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짐. 천재적인 음악성과 함께 시류에 편승하는 능력까지 겸비해 대중과 귀족들을 모두에게 인기를 얻음. 특히, 귀족들의 후원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작곡에 열중할 수 있었으며, 전성기 때는 전유럽 최고의 인기 연예인 대접을 받았음.
주변 사람들의 혐오감을 살 정도로 괴팍하고 까다롭고 의심 많은 성격이었음. 근거 없이 사람들을 의심했으며 아주 조금만 성질을 건드려도 불같이 화를 냈음. 거기에 덧붙여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버릇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음. (이런 성격은 청력을 잃은 후 더욱 심해짐.)
수 차례 연애에 실패한 후 더욱 우울하고 폐쇄적인 성품으로 발전. 이후 죽을 때까지 외로운 삶을 살아감.
이십대에 급성 중이염으로 점차적으로 청력을 상실하기 시작, 말년엔 나무토막을 피아노에 연결하고 그 끝을 이빨로 물어 느끼는 진동으로 소리를 들었다고 함.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작곡자였지만, 작곡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음. 그는 음표 하나를 그리는데 20분이 걸릴 정도로 엄청나게 숙고하면서 창작을 했다고 함.
무서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데다 권위에 도전적인 인물이었음. 하루는 절친한 관계였던 괴테와 길을 가다가 왕가의 행렬과 마주쳤으나 고개 한번 굽히지 않고 그냥 지나침. 되려 베토벤은 옆에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한 괴테를 크게 비난함.
말년, 대중과 귀족들의 음악 취향이 바뀌면서 베토벤의 인기는 크게 하락, 게다가 후원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말년을 가난 속에서 작곡을 해야 했음.
폐병으로 죽은 동생의 아들 카를을 자신의 친자식처럼 키움. 베토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카를은 극도로 비뚤어진 삶을 살았고 삼촌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
1827년 지병으로 사망. 그는 죽기 직전까지 알코올 중독, 발작, 구토 설사 등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피폐한 상태였음. 친인척과 지인, 어느 누구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않은 채 외로운 죽음을 맞음.
어록
"옮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 능히 불행을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고 자유를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비록 왕좌의 편을 들어서라도 절대로 진리를 배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두보(杜甫)
712-770. 당나라 현종 대의 천재 시인.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한시(한문으로 쓰여진 시)를 남긴, 중국 문예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중국 최고의 시인이었으며, 심오한 은유와 깊은 문학성은 역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함. 개인적으론 사회성이 부족한 폐쇄적 성격으로 평생 불행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절망감 때문에 병적으로 창작에 집착했음.
인정 많고 우유부단하고 생활력 약한 전형적인 선비형 인물. 유서 깊은 선비 집 아들로 출생. 젊은 시절을 과거 공부에 바친 평범한 골방 샌님이었음. 그러나 문학적으로 상당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자신도 그 점에 적지 않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명문가는 아니었지만 뼈대 있는 양반 가문 출신성분이라는 자존심도 있었음.
사교성도 없고 매사에 서툴며 고지식해 보이는 문학 청년이었으나, 두보는 정통 선비 집안에서 자라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관직에 나아가 집안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고지식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음.
과거에는 연이어 낙방. 과거를 통한 정계 진출을 포기함. 자신의 문학적 재능으로 관직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장안으로 향함. 이곳에서 10년이 넘는 동안 높은 사람들의 처소에 들락거리며 정계에 진출하려 하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함. 그는 결국 빈궁하고 굴욕적이었던 장안의 삶을 버리고 귀향.
40대에 간신히 지방의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함. 그 후 왕궁 사간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잠시나마 세속적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음. 그러나 워낙 체질적으로 처세에 서툰 탓에 왕의 미움을 사 곧 변방으로 쫓겨남.
당대 한시 작가로서 쌍벽을 이루는 이백(701-762)과 절친한 사이였음. 이백과 두보는 서로 완전히 정반대의 인간형이었음. 이백이 미천한 집안 출신에 술과 여자, 쾌락을 즐기는 디오니소스 형 예술가였다면, 두보는 양반가 출신에 매우 모범적이고 보수적인 아폴로 형 예술가였음. 게다가, 이백은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쉽게 헤어져 잊어버리는, 방랑벽이 극심한 인물이었던 반면, 두보는 친한 사람은 극소수였으나 이들과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음.
두 자식이 딸린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두보는 평생 무직, 말단 공무원 직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됨. 나중엔 순전히 굶어죽지 않기 위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됨.
그는 나이가 들고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자신의 시에 더욱 집착했다. 자신의 인생에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평생 수천 개의 시를 썼고 이 중 1500 편이 전해진다.
그는 시는 일반인이 뜻을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고 내용이 깊기로 유명함. 재미있게도 이런 시를 쓴 이유는 체질적으로 평이한 문장을 쓰지 못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음. 그는 이야기를 할 때나 편지 같은 평문을 쓸 때도 고도로 발달된 은유를 심하게 섞어 쓰기 때문에 평소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함.
중국에 유실되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한시의 수는 1만 수 정도. 이중 15%인 1천 500여 수가 두보의 작품일 정도로 중국 문학사에서 두보의 위치는 어마어마함.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분명치 않음. 야사에 따르면 오랜만에 얻어먹은 소고기를 과식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신뢰성이 없다. 홍수를 만나 배위에서 생활하다가 겨울에 배 안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
어록
찬바람은 소슬하니 너를 몰아쳐, / 때를 놓친 너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없겠구나. / 이 집 서생은 덧없이 백발이 되어, / 바람 앞에서 자꾸만 네 향기를 맡으며 우노라.
- [가을비 탄식] 중에서
봉화는 봄 석 달을 끊이지 않고, /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의 값이 있네/ 흰 머리를 긁으니 머리카락 더욱 빠져서, / 이제는 비녀조차 꽂을 수 없네.
- [춘망] 중에서
다시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가, / 표연히 이 현을 떠나네. / 내 몸은 흙덩이 같은데, / 배는 또 다시 강호에 뜨네.
- [배로 강릉 남포를 떠나며] 중에서
- 카미유 생상(Camille Saint-Saens)
1835 - 1921.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한 천재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평론가, 작가, 천문학자, 철학자, 정치인. 우리에게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소품 [동물의 사육제] 등의 작곡가로 유명한 생상은 당시 거의 모든 예술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당시 유럽 제일의 지성인이었음. 유럽 전역에서 부와 명예를 쌓은 상류층 인사이었으면서도, 극도로 보수적이고 결벽증적인 생활로 평생 불행하게 삶.
전형적인 낭만주의 예술가로 전세계 각지를 돌며 세계 각 지역을 소재로 한 음악을 만들어 냄. 특히 우루과이를 방문해 그 나라의 국가를 작곡해 준 것으로 유명. 생상은 세계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작곡가로 알려짐.
강한 소신의 민족주의 음악가였음. 프랑스 고유의 음악과 예술 부흥을 위해 국민음악 협회 창설했으며, 프랑스 음악의 전통을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살림. 음악 활동 면에선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당시 전 유럽을 휩쓴 독일과 이탈리아 음악에 대항할 수 있는 프랑스 음악의 기틀을 다진 장본인. 이후 포레, 라벨 등의 프랑스 음악의 대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음.
보수적 청교도인에 부르주아 사상으로 무장한 인물로 정치계 활동도 활발했음. 특히, 프랑스 제국주의 확대를 열렬히 지지해 오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함.
성격이 극도로 까다로운 인물이었음. 변덕이 매우 심했으며, 흥분하면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았던 데다, 비정상적인 방랑벽이 있어 일정한 거주지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음.
일생을 고독 속에서 살았음. 40세에 결혼했으나, 어머니의 반대, 두 아들의 이른 죽음 등으로 6년 만에 별거. 그 뒤로 평생 어머니와 함께 살며 다시는 여자와 교제를 하지 않음.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었음.)
금욕에 지나친 강박 증세를 보여, 육욕을 억제하고 부를 쌓는데 모든 힘을 쏟음.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항상 불행하게 살았음.
1921년 파리에서 사망. 죽을 당시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은 아랍인 시종 가브리엘 밖에 없었음.
-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근대 미술가들 중 가장 독창적인 화풍과 기이한 삶으로 유명 인사가 된 네덜란드 출신 화가. 어린 시절 시골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엄하고 종교적인 가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 어릴 때부터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자신감이 결여된 인물로, 이런 성품은 그의 이른 죽음(자살)의 원인이 됨. 거의 장애에 가까운 불안한 성품을 갖고 있어서 사람을 사귀고 사회에 적응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음. 한때 경직된 도덕관념의 소유자로, 목사가 되고자 했으나 "지나치게 열성적"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 나고 만다. 결국 그림에 뜻을 두고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엔 사회적인 목적의 그림을 많이 그렸으나 차츰 자기 고유의 색을 찾는데 열중한다. 특히 정신착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그는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을 역작들을 생산하기 시작. 그러나 결국 평생 단 한 개의 작품만 팔릴 정도의 철저한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189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 러시아 출신의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학가. 현대 평론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선과 악, 비참과 초월 등 인간의 모든 면을 성공적으로 그려냄. 도스토예프스키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주눅 든 어린 시절을 보냈음.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와 어울려 다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거친 뒤, 군에 입대하는 등 극적인 인생역정을 겪었지만 여전히 주눅 들고 소심하며 폐쇄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의 사상과 소설 속 이야기는 그 어떤 현대 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장엄한 색채를 보이고 있음.
그래도.. 그래도..
당신과 비슷한 인물 중에 인생 험하게 사신 분이 왜 저리 많대요..?
어서 다음편이나 써! 쓰란 말이야!!
(혼나기 전에 자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