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嵐
[연재] 月暈 (3)
highenough
2005. 7. 24. 02:31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어느덧 완연한 여름 날씨가 되고, 약속된 쇼의 혼인은 점점 다가왔다. 두 달이 다 흐르도록 오노와 쇼는 대화가 끊긴 상태였고, 오노는 방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만 그릴 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방 밖을 잘 나서지도 않았다. 그나마 더운 날씨 때문에 방문을 열어 놓는 시간이 많이 생겼지만 그나마도 쇼가 출타한 중이거나 도장에 가서 한참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때뿐이었다. 성내에서는 오다이의 임신 소식이 알려져 모두들 경사를 기뻐하는 분위기였으며, 사쿠라이 가에서는 혼인에 즈음하여 알려진 경사에 각별히 더 들떠 있었다.
하제로 다가온 혼인에 집안은 온통 부산했다. 그 속에서 오노의 주변만이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분위기였다. 녹지 않은 눈이 쌓인 정원을 그리던 오노는 어느덧 푸름이 짙어진 정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오노는 그저 멍한 상태였다.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각만 했을 뿐, 쇼에 대한 원망이나, 지금까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것이든 노부모토에게 품었던 것이든 그 어떤 원망의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순히 식사 때 부르면 가서 밥을 먹었고, 조금 늦게이지만 제 때 잠들어 제 때에 일어났고, 제 때 씻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이따금씩 방문을 열어 눈 앞에 보이는 것을 그렸고 종이가 떨어지면 시종아이에게 종이를 부탁했다. 특별히 쇼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매 끼니 때 쇼는 나타나지 않았고 쇼는 거처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돌아오는 정도였으므로 오노와 마주칠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노는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심히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넘겼다. 문득 자신의 앞머리가 꽤 자랐음을 느끼고 서랍에서 가위를 찾았다. 바닥에 종이를 깔고 적당히 손대중으로 앞머리를 잘랐다. 크고 위협적으로 생긴 가위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오노의 검은 머리카락을 조금씩 조금씩 잘라 흰 종이 위로 떨어뜨렸다. 보지 않으면서 한 가위질에 오노의 손에 감겨있던 명주천이 잘려서 풀어졌다. 드러난 상처는 거의 아물어 있었으나 꽤 상처가 깊었던 듯 흔적은 깊게 남아 있었다. 이제 더이상 손을 핑계로 도장에 안 나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노는 깔았던 종이를 명주천도 함께 접어서 문가의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저녁 때 태워버리기 위함이었다. 문가까지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날씨는 여간 후텁지근한 것이 아니어서 땀이 솟는 듯했다. 하제면 벌써 5월 보름이라 장마가 곧 들 때였으므로 사쿠라이 가에서는 차라리 날씨가 더운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알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노도 쇼의 혼사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규수가 누구의 딸인지, 성품은 어떻고 외양은 어떤가 하는 것들에 대해 들을 때마다 오노는 '그렇군요.'같은 말로 응수하긴 했지만, 자신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의해 의식적으로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 대하여 잊으려 애썼다. 기억하는 것이 싫었다.
"오노님."
"네?"
오노가 오랜만에 자신의 검을 꺼내보려고 일어나는데 복도에서 시녀 한 명이 오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간 이상하게는 생각했지만 오노의 두문불출에 별로 참견하지 않았던 사쿠라이 가였는데 조심스러운 시녀의 목소리에 오노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주인나리께서 줄 것이 있으니 잠시 건너오라고 하셨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슌과 마주 하는 것은 실로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쇼와 거의 비슷했다. 무슨 일일까 의아하며 오노는 두 달만에 네마키가 아닌 무사복을 입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소타로. 오랜만일세."
"먼저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닐세. 부상이 있었다면서."
"다 나았습니다."
"다행일세."
슌은 소타로와 쇼가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부상, 쇼와 관련 있는 것인가?"
잠시 멈칫한 오노를 놓치지 않은 슌은 역시 모종의 사건이 있었음을 결론내릴 수 있었다. 오노의 대답이 무엇이건 간에.
"대련하다가 제 실수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진검으로 대련을? 더군다나 자네 실력으로 우리 쇼는 쉬웠을 텐데?"
"아닙니다. 쇼 군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다 자네 덕이야. 그 녀석 전에는 수련도 하는둥 마는둥이었다네."
오노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슌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될 수 있는 한 자신들이 해결하도록 놔두기로 마음먹고 오노를 돌려보냈다. 오노가 방으로 돌아오자 방에 얇은 흰 종이에 쌓인 방석 크기의 물건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쇼의 어머니가 보냈을 히타타레였다. 타비, 목면 조리에 센스까지 그야말로 정장이 전부 갖추어져 있었고, 특별히 새하얀 센스는 쇼의 동생 마이가 골랐다는 글도 남아 있었다. 하카마, 나가기와 하오리가 모두 짙은 자색이었고, 하오리와 하카마의 끝단에는 센스와 같은 손 길이 정도의 흰 가로 줄무늬가 있었다. 하제가 쇼의 혼례라는 것이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아직 쇼와 오노 사이에는 앙금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왠지 오노는 그런 상태로 쇼가 혼인해버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부터 쇼는 자신을 못미더워 했고 자신은 노부모토의 명을 받은 입장에서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쇼가 혼인한 뒤에도 그런 감정은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지금 현재 싫다는 감상이 앞섰다.
밤이 되어 선선해진 날씨에 상쾌한 기분이 들어 오노는 늘 방에 앉아 보기만 하던 정원에 나와 조금 걷는 중이었다. 날이 아주 맑아서 달이 유난히 밝았다. 오노는 무릎 높이의 네모난 우물에 걸터 앉았다. 유독 사쿠라이 가는 처마 밑에 우물을 두지 않고 정원의 한쪽에 우물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지었다.
"春高樓の花の宴 巡る盃かげさして 千代の松が技わけ出でし 昔の光いまいずこ"
유난히 밝았지만 달무리가 낀 달을 보며 오노는 무의식 중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불렀다.
불쌍한 어머니..
오노는 항상 어머니가 가여웠다.
오노의 아버지가 가리야에 이웃한 성 하나를 함락하고 얻어 온 여인이 바로 오노의 어머니였다. 다름 아닌 적장의 아내로 자결하려던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온 것이었다. 그 여인은 아름다웠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그 성에서도 오노의 아버지는 그 여인을 찾아내어 붙잡아 왔다. 첫눈에 반한 사람의 남편을 죽이고 그 여인을 데려왔다. 몇 번이고 자결을 시도하던 그 여인에게 사랑을 호소했고 강요했고 애원했고 구걸했고 강제로 가졌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소타로였다. 그는 소타로를 끔직히 예뻐했다. 첫 아들이었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사람이 낳은 아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묵묵히 키울 뿐 더이상 반항도 하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그 여인은 숨 쉬는 나무 인형처럼 살았고, 그는 그런 모습에 더 기다리지 못 하고 측실을 들이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소타로가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는 그 여인에게 나타나지도 않았다. 여인이 죽었을 때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성을 슬퍼하는 노래를 하면서 죽은 남편을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날 수밖에 없던 그 운명이 서러워 노래한 것이었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오노는 항상 어머니를 가엾게 여겼다.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는 자신을 수련시킬 때 외에는 자신마저도 꺼려했다. 그렇게 오노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게, 그렇게 외롭게 살았다.
늘 적에게 위협받는 것이 무사의 인생이라, 어머니가 죽은 그 해의 겨울 전투에서 오노의 아버지도 전사했다. 그런 상태에서 오노는 도주해 온 가문의 무사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더불어 조금이라도 잘못에 휘말리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노부모토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부모토는 곧 오노에게 접근해왔고 연인이었던 구마무라熊村의 오쿠니於國와 동침하러 갈 때마다 오노를 범했다. 구마무라에 동행하는 수행 무사는 오노뿐이었고, 노부모토가 자신을 범하는 이유를 오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노부모토가 충성의 확인이 목적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秋陣營の霜の色 鳴きゆく雁の數見せて 植うる劍に照りそいし 昔の光いまいずこ"
분명 울지 않았는데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오노는 울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오노는 오열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슬퍼서였겠지만 오노는 자신의 손으로 그 증오스러운 아버지를 베기 전에 죽은 것이 원통해서였다. 장례 이후로 오노는 일체 어머니 생각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도 없었다. 어머니의 삶은 슬펐을지 모르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는 것은 더욱 어머니를 슬프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오노는 절대로 어머니 생각에 울지 않았다. 도대체 왜 흐른 눈물일까. 오노는 다소 당혹스러웠다. 본래 눈물이 흔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약함이 허용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었다.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 와서 오노는 벌써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노부모토에게 처음으로 안겼을 때에도 오노는 울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에도 입술을 깨물고 참아냈다. 노부모토로부터 독하다는 이유로 더욱 시달려야 했지만 오노는 절대로 울지 않았었다.
눈물을 손으로 슥 닦아낸 오노는 문득 시간이 늦었음을 문득 깨닫고 우물가에서 일어나 다시 정원을 걸었다. 자신의 방 앞에서 게타를 벗고 올라서는데 마침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오는 쇼와 마주쳤다. 그야말로 두 달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었다. 잠시 서로에 놀라 멈춰 섰던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히다가 오노가 쇼를 향해 정면으로 돌아서서 입을 열면서 다른 길로 어긋났다.
"혼인 축하드립니다."
"응."
숙인 오노의 뒷머리를 바라보는 쇼의 시선이 편치 않았지만 대꾸하자마자 쇼는 허리를 숙인 오노의 옆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오노는 쇼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잠시동안 그대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일찍 잠들고 싶어 잠자리에 든 오노는 끊임 없이 울어대는 풀벌레들 소리에 뒤척이다가 벌써 장지문에 시리게 번저오는 새벽빛을 느끼고 아예 방문을 열었다. 여름이긴 했지만 찬 새벽공기에 오노는 순간적으로 오한을 느꼈다. 싫지 않은 쌀쌀함에 찬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자 콧속이 일순 얼어붙는 것 같기도 했다. 허옇게 밝긴 했지만 정원은 온통 안개가 잔뜩 끼어서 마치 자신만 별세계에 떨어진 듯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에 뚝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달무리가 지면 다음날 비가 온다고 하셨는데 안개까지 낀 것을 보면 날씨는 화창할 것 같았다. 어제 하제였던 오늘, 오늘같은 맑고 눈부신 날에 쇼는 혼인할 것이다. 스쳐가는 찬 바람에 몸을 살풋 떤 오노는 다시 한 번 예고없이 떨어지는 자신의 눈물에 당황했다.
오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 신부는 두 시진이나 더 있어야 온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이의 성화로 히타타레를 입고 나오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흐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