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FlytotheSky
[연재] 만화가 vs. 소설가 (5)
highenough
2005. 5. 28. 20:23
만화가 vs. 소설가
(5) D-16
어렸을 때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다. 강아지가 집에서 유독 나를 따랐고, 나도 그 강아지를 좋아했다. 밤이면 늘 거실에 있는 자기집을 두고 내 옆에 와서 잠들었다. 옆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끌어 안고 잤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에 나중에는 강아지가 없으면 잠을 못 이루기까지 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강아지의 체온은 사람보다 약간 높아서 안고 있으면 따뜻한 거라고 했다. 근데 지금도 따뜻한 걸 안고 있는 게 꼭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분명 그의 집에는 강아지 따위는 없는데..
게다가 옆으로 누운 내 왼쪽 다리 밑에도 있는 걸 보면 보통 개의 크기는 아닌데..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좋아서 끌어 안은 팔을 힘을 꽉 주어서 안았는데 간지럽게 약간 뜨거운 숨결이 목에 와닿았다. 아직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참고 계속 자려고 하는데 너무 간지러워서 하는 수 없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이 얼른 제대로 안 떠져서 눈을 비비려고 오른 손을 들었는데 오른 손이 들리지 않는다. 왼 손으로 눈을 비비고 사태를 파악해보니까 오른 팔은 그의 희게 드러난 목의 아래에 있었고, 그는 베개에 누운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안은 몸이 따뜻했던 건 강아지라서가 아니고 그가 체온이 그 만큼 높았다는 얘기. 그의 간호와 간만에 푹 잔 잠 덕분에 목은 좀 아프지만 몸은 한결 가벼운 나에 비해, 그런 나를 간호해준 그는 상태가 안 좋은 듯 보였다.
"민.. 흠흠.. 민규야.."
천 갈래, 만 갈래 정도로 갈라지는-박경림 씨도 오빠라고 부를 만한-목소리에, 입에서는 단내까지 났지만, 이마에 땀까지 몇 방울 달고 있는 그를 보니 깨워서 다시 제대로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꽉 감았다가 억지로 힘들게 뜨려하는 그가 걱정되었다. 눈도 못 뜨면서 내가 불편한 줄 아는지 먼저 말부터 꺼낸다.
"왜애..? 어디 불편해..?"
"아니. 너 아파 보여."
"응..? 나 안 아파.."
급기야 이불 속에 얌전히 포개어져 있던 손까지 눈을 비비느라 꺼내가며 갑자기 엄청 짙게 쌍꺼풀진 눈을 뜨며 안 아프다고 믿기 힘든 말을 한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도 이미 많이 갈라진 상태.
"네 목소리도 내 목소리랑 비슷한데?"
"우웅.. 그거는 자다 일어났으니까 그런 거지. 근데 지금 몇 시야??"
몇 시냐면서 일어나려고 고개를 살짝 든 그의 머리칼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장 위에 있는 탁상전자시계를 보기 위해 쌍꺼풀이 짙게 져버린 한 쪽 눈에 다른 쪽 눈은 마저 뜨기위해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면서 이불이 들리는 바람에 찬 공기가 스며드는지 갑자기 빈 자리로 한기가 느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 완전 늦잠 자버렸네.."
"몇 신데?"
"10시 53분. 일찍 일어나서 너 닭고기 스프 해주려고 했는데.."
목소리는 엉망으로 잠긴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뭘 해준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늦게 일어났다고 혼자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누워서 올려다 본 그의 뒷모습은 내가 신경써서 올려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흘러내린 니트안으로 옆으로 넓은 네크라인의 티셔츠 속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고개는 뒤로 젖힌 채였다.
"나 먼저 씻어도 돼?"
어느새 완전히 다 뜬 두 눈-쌍꺼풀 기운은 남아 있어 보였지만-을 깜빡깜빡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약간 틀어서 누워있는 날 보며 그가 물었다. 원래도 살가운 성격의 그라고 생각은 했지만 묻는 말은 꽤나 정다우면서도-안 들어줄 수 없는 말투다-요며칠 느낀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다.
"응. 얼마든지."
"Thanx."
대답하고는 일어날 것 같던 그가 별안간 다시 누워버렸다.
"근데 일어나기 싫다. 헤헤. 이불 안이 따뜻해서 일어나기 싫어. 좀만 더 누워있을래."
조금 더 눕는다고 누가 뭐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닌데 그는 베시시 웃으며 혼내지 말라는 양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올리고 파고 들었다. 이불 안으로 등이 동그랗게 되도록 웅크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왠지 귀여워져서 웃음이 난다.
"왜 웃어..?"
"아니야. 그냥. 귀여워서.."
"에-? 싫어 그런 말은."
귀엽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한지 약간 흥분하는 모습도 귀여워서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러자 삐쳤다면서 돌아눕는 그.
"뭐야, 윤석 군. 놀리기나 하고. 나쁘잖아. 남자한테 귀엽다닛!"
돌아누운 뒷모습에 쑥쓰러운지 빨개지는 얼굴이 얼핏 보여서 장난이 더 치고 싶어졌다.
"민규야.. 안 웃을게. 귀엽다고도 안 할게. 응응..?"
하면서 돌아누운 옆구리 공격.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누우려는 그를 한 팔로는 안아서 고정시키고 한 팔로는 마구 간지럽혔다.
"하.. 하지.. 하지 마아.. 하하하하.."
내 팔을 꼬집고 난리가 났지만 웃느라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한참을 당하고 나서야 안 삐쳤다면서 항복. 이미 숨이 차서 우리 둘 다 땀은 뻘뻘 흘리고, 숨은 몰아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몸을 휙 돌린 그가 이마를 탁 때리면서 두고 보잔다. 그것도 왠지 아이같아서 웃었더니 땀을 흘려서 정말 씻어야겠다며 옆으로 누웠던 자세 그대로 천천히 슬로우 모션같이 일어난다. 욕실 쪽 벽에 있는 장에서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 불을 켜던 그가 커튼을 쳐두어서 어두웠던 방보다 갑자기 밝은 불빛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다.
"에- 바보같아. 너 때문에 힘 빼서 그렇잖아!"
아침부터 스스로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는 그. 욕실 문을 빼꼼 연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고 그렇게 말 하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유쾌한 느낌. 그도 일어났겠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더니 여기저기 찌뿌둥한 게 어제 앓기는 했던 가보다. 천천히 이불을 개어놓고 거실로 나가 TV를 켜고 코타츠에 앉았다. 역시나 따끈하고 노곤한 느낌에 다시 눈이 감기려는데 그가 방을 들러서 내가 없는 것을 봤는지 방에서부터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씻으세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싱긋.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저렇게 쓰는 존댓말은 그렇게 무겁지 않고 살갑다. 씻고 나왔더니 그는 부엌에서 냉장고에 상체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뭐 찾는 중?"
"응. 아무래도 동네 수퍼라도 다녀와야겠다."
"같이 가."
"너 아픈데 그냥 혼자 갔다 올래."
"나 안 아픈데. 같이 가줄게."
아무래도 나한테 감기를 단단히 옮은 것 같은 그를 혼자 보내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같이 가쟀더니 끝까지 병자 취급이다.
"그냥 집에 있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찬 바람 쐬면 다시 심해질지도 몰라."
말을 마치고 수퍼에 갈 준비를 하려는지 방으로 들어간 그에 이어서 나도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할 거 뭐 있나 싶어서 대충 두꺼운 패딩 점퍼 하나 걸치고 코타츠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수퍼에 간다는 그는 보통보다 약간 헐렁한 밝은 색 청바지에 트레이닝 점퍼를 목까지 올린 채였다.
"집에 있으라니까. 기어이 따라나서려고?"
"응.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근데 동네 나간다면서 이러면 춥잖아."
"아- 그냥 가는 김에 마트 가려고."
"내가 운전해줄게. 같이 가."
"약기운에 운전하는 거 아니야?"
"죽지는 않을 거야."
"에-."
포기를 한 건지 그는 그냥 앞서서 현관을 나섰고, 내가 현관 신발장 위의 큼직한-중국 것이라는 느낌이 확 나는-접시에 놓인 차 열쇠를 챙겨서 앞코를 바닥에 탕탕 쳐서 운동화를 다 신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나오자 비로소 함께 몸을 돌려 차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차 앞에서 빙 돌아가 조수석에 탄 그는 시동을 거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젖히고 시트에 파고들면서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기사도 생기고 좋네. 안전 운전 お願いします。"
이마트가 가까운 곳에 새로 열어서 좋다는 얘기와 히터를 세게 틀면 목 아플 거라는 얘기와 오늘부터는 작업할 건데 보겠느냐는 얘기와 아픈데 계속 누워 있어야 되는데 되도 않는 고집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마트에 가는 건 물론 주차장에 주차까지 마쳤다.
"다 왔습니다, 손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서 그와 함께 카트를 밀며 쇼핑을 했다. 감자, 양파 작은 망, 당근 한 봉지, 닭고기 같은-확실히는 모르겠다-것, 마늘바게트를 샀다.
뒷좌석에 짐들을 싣고 조수석에 앉은 그가 다시 그 예의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으며 벨트를 매었다. 그 자세로 차 안에 있던 CD들을 뒤적이던 그가 제목이 없는 구운 것 같은 CD를 카오디오에 넣고 말을 걸어왔다.
"옛날 노래 같은 거 가끔씩 듣고 무지무지 싶을 때 있잖아. 그래서 구운 건데.. 들어도 되지?"
"아, 응."
사실 어차피 자기 차인데 나한테 묻기까지 하다니..
"I'll be loving you, forever.. Deep in side my heart you'll leave, never.."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노랜데..
"이거 제목이 뭐였지?"
"Forever.. Damage 노래.."
아..
Damage..
늘 그룹이름하고 안 맞게 달짝지근하다고 생각했던 노래다.
"I knew I loved you before I met you.. I think I dreamed you into life.."
이것도 그룹이름이랑 안 어울리는 건데..
"Savage Garden의 I knew I loved you. 이제 보니까 기억 안 난다고 표정 막 변하네.."
아, 그렇다.
나는 기억이 죽어도 안 날 때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다음 곡의 제목은?"
그러면서 나온 노래는 진짜로 질리게 들었던, 제목 따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 노래였다.
"98˚의 I do."
"正解。어떻게 이번엔 바로 기억했어?"
"정말 많이 들었었어.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ちょっと意外ね。"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계속 달짝지근한 노래만 나왔다.
"이런 노래 좋아해?"
"무슨 노래?"
"음.. 그러니까.. 좀 달짝지근한 노래."
"달짝지근이라.. 그냥 유독 땅길 때가 있는 거 같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응."
"I do cherish you.. for the rest of my life.. you don't have to think twice.. I will love you still.. from the depths of my soul.. It's beyond my control.."
평일 오후의 길은 적당히 달릴만 하게 비어서 노래를 서너 곡 듣자 집에 다달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자 조금 먼저 내려서 뒷좌석의 짐을 손에 든 그가 현관을 향해 걸었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양을 샀다거나 한 것은 아닌데 왠지 그의 손가락에 간당간당 걸려있는 마트의 비닐 봉지가 무거워 보였다.
"그냥 내가 들어도 돼."
"아니야. 내가 들게. 어서 문 열어줘."
그는 포로로 뛰어서 현관을 열었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휘청거리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열이 있어서일까, 그가 열이 있어서일까. 식탁 위에 비닐 봉지를 내려놓자 그가 다가와서 사온 것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윤석, 배고프지? 어제도 죽 밖에 못 먹고.. 그러고보니 힘도 하나도 없을 텐데 부려먹었네."
"네 말 들으니까 배고픈 줄 알겠다. 배고파."
"御免ね。ちょっと待って下さい。"
그가 방에 가볍게 달려 들어가서 간단한 트레이닝 바지와 가로줄무늬-다소 꿀벌 컨셉-인 카디건을 노란색 바탕에 외국말-영어는 아닌 것 같은-이 뭐라고 뭐라고 크고 굵직한 글씨로 가득 적혀 있는 티셔츠 위에 걸쳐 입고 나왔다. 멈추지 않고 직진해서 냉장고 옆에 있는 좁은 수납장의 서랍에서 손바닥 크기로 접힌 앞치마-그의 말로는 무슨 '피터래빗'인가 하는-를 꺼내어 둘렀다. 그 아래로 뭔가를 더 뒤적이더니 그가 좋아할 것 같은 색의 앞치마를 꺼내 와서는-허리 아랫부분만 있고 끈이 긴-앞치마를 내 뒤에 선 채로 한 바퀴 돌려 앞부분에서 묶어주었다. 매듭이 잘 안 보이는지 어깨에 턱을 괴고 꽤 단단하게 매었다.
"배고프다고 했으니까 빨리 먹으려면 조금만 도와주세요."
"응."
"배 집어넣어. 아저씨도 아니면서 무슨 배가 이래?"
갑자기 무방비 상태였던 배를 '흡!'하면서 집어 넣었더니 턱을 괸 채로 웃는 게 어깨로 느껴졌다.
"다 묶었다. 양파 껍질 좀 까주세요-"
괴었던 턱을 떼면서 스치는 그의 머리칼 때문에 간지러운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길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내가 껍질을 벗겨준 양파와 감자 껍질 벗기는 칼로 벅벅 긁은 당근은 그가 유학 생활에서 갈고 닦았다는 기술로 모양 좋게 썰렸고, 홈쇼핑을 보다가 넋을 잃은 상태에서 주문했다는 주물 팬에 적당히 볶인 뒤, 그 동안 끓인 닭육수와 월계수잎과 함께 끓여졌다. 그가 생크림과 버터를 넣고 계속 저어가며 끓이는 모습을 홈바에 앉아서 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불렀다.
"윤석 군, 간 좀 봐줘."
"응."
가까이 가자 앉아 있을 때에는 전혀 알 수 없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런 곳에 잘도 서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작은 접시에 받쳐들고 '아-' 하고 말했다.
"뜨겁지 않아?"
뭔가 어린애 같은 내 질문에 대답없이 '호- 호-' 불더니 다시 '아-'했다. 뜨거운 음식에 유독 약하기 때문에 한 번 멈칫 했지만, 그가 뭔가 요구하면 사고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통에 별 생각 없이 받아 먹었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맛.
"어때? 맛있어?"
"맛있어."
"간은?"
"좋아."
"다 됐다. 이제 얼른 먹자."
싱긋과 머리 쓰다듬기 콤보 공격. 내가 하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잘 하니까 그도 나를 어린 애 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바게트 꺼내서 저기에 담아줘."
스프를 그릇에 담으면서 턱끝으로 가리킨 곳에 작은 캐러멜색 바구니가 있었다. 빵을 봉지에서 꺼내서 적당히 담고 식탁에 놓았더니 그가 스프 그릇 두 개를 쟁반에 올려 가져왔다. 식탁에 유리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놓은 그가 나의 대각선 방향에 앉았다.
"戴きます。내 구경 그만하고 드세요."
또 그를 빤히 보고 있었는지 핀잔을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스프를 먹었다.
"이건 이 용도."
그가 빵을 적당히 뜯어서 스프에 찍더니 또 '아-'했다. 진짜로 어린 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재촉했다.
"손 부끄럽잖아. 아-."
그가 미간을 밉지 않게 찌푸리며 말하자 더이상 저항할 생각 따위는 언제 있었냐는 듯 날아가고 냉큼 받아 먹었다.
"잘 먹네요. 윤석 어린이."
쿵.
역시나 였구나.
아주 엉덩이라도 토닥토닥 해줄 태세인데, 이건.
"응? 갑자기 왜 안 먹어?"
"아.. 아니야."
큰일이라도 난 것 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에 다시 '싱긋 빔'을 쏘는 그.
"감기에는 chicken soup이라고 미국에서 너무 못이 박히게 들어서 그런지 이걸 먹어야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먹고 또 먹어."
뭔가-멍한 게 아니라-먼 표정을 지은 그가 다시 싱긋 웃었다. 바보같이 잠깐 굳었다가 그가 싱긋 웃자 베시시 따라 웃어버렸다.
"뭐야, 윤석 군. 그런 웃음은 바보 같잖아."
웃음을 터뜨린 그가 비로소 안심된다.
스프를 다 먹어서 그런지 온몸 구석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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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0
letsbe.co.to
(5) D-16
어렸을 때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다. 강아지가 집에서 유독 나를 따랐고, 나도 그 강아지를 좋아했다. 밤이면 늘 거실에 있는 자기집을 두고 내 옆에 와서 잠들었다. 옆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끌어 안고 잤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에 나중에는 강아지가 없으면 잠을 못 이루기까지 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강아지의 체온은 사람보다 약간 높아서 안고 있으면 따뜻한 거라고 했다. 근데 지금도 따뜻한 걸 안고 있는 게 꼭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분명 그의 집에는 강아지 따위는 없는데..
게다가 옆으로 누운 내 왼쪽 다리 밑에도 있는 걸 보면 보통 개의 크기는 아닌데..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좋아서 끌어 안은 팔을 힘을 꽉 주어서 안았는데 간지럽게 약간 뜨거운 숨결이 목에 와닿았다. 아직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참고 계속 자려고 하는데 너무 간지러워서 하는 수 없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이 얼른 제대로 안 떠져서 눈을 비비려고 오른 손을 들었는데 오른 손이 들리지 않는다. 왼 손으로 눈을 비비고 사태를 파악해보니까 오른 팔은 그의 희게 드러난 목의 아래에 있었고, 그는 베개에 누운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안은 몸이 따뜻했던 건 강아지라서가 아니고 그가 체온이 그 만큼 높았다는 얘기. 그의 간호와 간만에 푹 잔 잠 덕분에 목은 좀 아프지만 몸은 한결 가벼운 나에 비해, 그런 나를 간호해준 그는 상태가 안 좋은 듯 보였다.
"민.. 흠흠.. 민규야.."
천 갈래, 만 갈래 정도로 갈라지는-박경림 씨도 오빠라고 부를 만한-목소리에, 입에서는 단내까지 났지만, 이마에 땀까지 몇 방울 달고 있는 그를 보니 깨워서 다시 제대로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꽉 감았다가 억지로 힘들게 뜨려하는 그가 걱정되었다. 눈도 못 뜨면서 내가 불편한 줄 아는지 먼저 말부터 꺼낸다.
"왜애..? 어디 불편해..?"
"아니. 너 아파 보여."
"응..? 나 안 아파.."
급기야 이불 속에 얌전히 포개어져 있던 손까지 눈을 비비느라 꺼내가며 갑자기 엄청 짙게 쌍꺼풀진 눈을 뜨며 안 아프다고 믿기 힘든 말을 한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도 이미 많이 갈라진 상태.
"네 목소리도 내 목소리랑 비슷한데?"
"우웅.. 그거는 자다 일어났으니까 그런 거지. 근데 지금 몇 시야??"
몇 시냐면서 일어나려고 고개를 살짝 든 그의 머리칼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장 위에 있는 탁상전자시계를 보기 위해 쌍꺼풀이 짙게 져버린 한 쪽 눈에 다른 쪽 눈은 마저 뜨기위해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면서 이불이 들리는 바람에 찬 공기가 스며드는지 갑자기 빈 자리로 한기가 느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 완전 늦잠 자버렸네.."
"몇 신데?"
"10시 53분. 일찍 일어나서 너 닭고기 스프 해주려고 했는데.."
목소리는 엉망으로 잠긴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뭘 해준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늦게 일어났다고 혼자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다. 누워서 올려다 본 그의 뒷모습은 내가 신경써서 올려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흘러내린 니트안으로 옆으로 넓은 네크라인의 티셔츠 속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고개는 뒤로 젖힌 채였다.
"나 먼저 씻어도 돼?"
어느새 완전히 다 뜬 두 눈-쌍꺼풀 기운은 남아 있어 보였지만-을 깜빡깜빡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약간 틀어서 누워있는 날 보며 그가 물었다. 원래도 살가운 성격의 그라고 생각은 했지만 묻는 말은 꽤나 정다우면서도-안 들어줄 수 없는 말투다-요며칠 느낀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다.
"응. 얼마든지."
"Thanx."
대답하고는 일어날 것 같던 그가 별안간 다시 누워버렸다.
"근데 일어나기 싫다. 헤헤. 이불 안이 따뜻해서 일어나기 싫어. 좀만 더 누워있을래."
조금 더 눕는다고 누가 뭐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닌데 그는 베시시 웃으며 혼내지 말라는 양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올리고 파고 들었다. 이불 안으로 등이 동그랗게 되도록 웅크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왠지 귀여워져서 웃음이 난다.
"왜 웃어..?"
"아니야. 그냥. 귀여워서.."
"에-? 싫어 그런 말은."
귀엽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한지 약간 흥분하는 모습도 귀여워서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러자 삐쳤다면서 돌아눕는 그.
"뭐야, 윤석 군. 놀리기나 하고. 나쁘잖아. 남자한테 귀엽다닛!"
돌아누운 뒷모습에 쑥쓰러운지 빨개지는 얼굴이 얼핏 보여서 장난이 더 치고 싶어졌다.
"민규야.. 안 웃을게. 귀엽다고도 안 할게. 응응..?"
하면서 돌아누운 옆구리 공격.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누우려는 그를 한 팔로는 안아서 고정시키고 한 팔로는 마구 간지럽혔다.
"하.. 하지.. 하지 마아.. 하하하하.."
내 팔을 꼬집고 난리가 났지만 웃느라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한참을 당하고 나서야 안 삐쳤다면서 항복. 이미 숨이 차서 우리 둘 다 땀은 뻘뻘 흘리고, 숨은 몰아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몸을 휙 돌린 그가 이마를 탁 때리면서 두고 보잔다. 그것도 왠지 아이같아서 웃었더니 땀을 흘려서 정말 씻어야겠다며 옆으로 누웠던 자세 그대로 천천히 슬로우 모션같이 일어난다. 욕실 쪽 벽에 있는 장에서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 불을 켜던 그가 커튼을 쳐두어서 어두웠던 방보다 갑자기 밝은 불빛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다.
"에- 바보같아. 너 때문에 힘 빼서 그렇잖아!"
아침부터 스스로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는 그. 욕실 문을 빼꼼 연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고 그렇게 말 하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유쾌한 느낌. 그도 일어났겠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더니 여기저기 찌뿌둥한 게 어제 앓기는 했던 가보다. 천천히 이불을 개어놓고 거실로 나가 TV를 켜고 코타츠에 앉았다. 역시나 따끈하고 노곤한 느낌에 다시 눈이 감기려는데 그가 방을 들러서 내가 없는 것을 봤는지 방에서부터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씻으세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싱긋.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저렇게 쓰는 존댓말은 그렇게 무겁지 않고 살갑다. 씻고 나왔더니 그는 부엌에서 냉장고에 상체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뭐 찾는 중?"
"응. 아무래도 동네 수퍼라도 다녀와야겠다."
"같이 가."
"너 아픈데 그냥 혼자 갔다 올래."
"나 안 아픈데. 같이 가줄게."
아무래도 나한테 감기를 단단히 옮은 것 같은 그를 혼자 보내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같이 가쟀더니 끝까지 병자 취급이다.
"그냥 집에 있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찬 바람 쐬면 다시 심해질지도 몰라."
말을 마치고 수퍼에 갈 준비를 하려는지 방으로 들어간 그에 이어서 나도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할 거 뭐 있나 싶어서 대충 두꺼운 패딩 점퍼 하나 걸치고 코타츠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수퍼에 간다는 그는 보통보다 약간 헐렁한 밝은 색 청바지에 트레이닝 점퍼를 목까지 올린 채였다.
"집에 있으라니까. 기어이 따라나서려고?"
"응.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근데 동네 나간다면서 이러면 춥잖아."
"아- 그냥 가는 김에 마트 가려고."
"내가 운전해줄게. 같이 가."
"약기운에 운전하는 거 아니야?"
"죽지는 않을 거야."
"에-."
포기를 한 건지 그는 그냥 앞서서 현관을 나섰고, 내가 현관 신발장 위의 큼직한-중국 것이라는 느낌이 확 나는-접시에 놓인 차 열쇠를 챙겨서 앞코를 바닥에 탕탕 쳐서 운동화를 다 신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나오자 비로소 함께 몸을 돌려 차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차 앞에서 빙 돌아가 조수석에 탄 그는 시동을 거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젖히고 시트에 파고들면서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기사도 생기고 좋네. 안전 운전 お願いします。"
이마트가 가까운 곳에 새로 열어서 좋다는 얘기와 히터를 세게 틀면 목 아플 거라는 얘기와 오늘부터는 작업할 건데 보겠느냐는 얘기와 아픈데 계속 누워 있어야 되는데 되도 않는 고집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마트에 가는 건 물론 주차장에 주차까지 마쳤다.
"다 왔습니다, 손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서 그와 함께 카트를 밀며 쇼핑을 했다. 감자, 양파 작은 망, 당근 한 봉지, 닭고기 같은-확실히는 모르겠다-것, 마늘바게트를 샀다.
뒷좌석에 짐들을 싣고 조수석에 앉은 그가 다시 그 예의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으며 벨트를 매었다. 그 자세로 차 안에 있던 CD들을 뒤적이던 그가 제목이 없는 구운 것 같은 CD를 카오디오에 넣고 말을 걸어왔다.
"옛날 노래 같은 거 가끔씩 듣고 무지무지 싶을 때 있잖아. 그래서 구운 건데.. 들어도 되지?"
"아, 응."
사실 어차피 자기 차인데 나한테 묻기까지 하다니..
"I'll be loving you, forever.. Deep in side my heart you'll leave, never.."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노랜데..
"이거 제목이 뭐였지?"
"Forever.. Damage 노래.."
아..
Damage..
늘 그룹이름하고 안 맞게 달짝지근하다고 생각했던 노래다.
"I knew I loved you before I met you.. I think I dreamed you into life.."
이것도 그룹이름이랑 안 어울리는 건데..
"Savage Garden의 I knew I loved you. 이제 보니까 기억 안 난다고 표정 막 변하네.."
아, 그렇다.
나는 기억이 죽어도 안 날 때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다음 곡의 제목은?"
그러면서 나온 노래는 진짜로 질리게 들었던, 제목 따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 노래였다.
"98˚의 I do."
"正解。어떻게 이번엔 바로 기억했어?"
"정말 많이 들었었어.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ちょっと意外ね。"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계속 달짝지근한 노래만 나왔다.
"이런 노래 좋아해?"
"무슨 노래?"
"음.. 그러니까.. 좀 달짝지근한 노래."
"달짝지근이라.. 그냥 유독 땅길 때가 있는 거 같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응."
"I do cherish you.. for the rest of my life.. you don't have to think twice.. I will love you still.. from the depths of my soul.. It's beyond my control.."
평일 오후의 길은 적당히 달릴만 하게 비어서 노래를 서너 곡 듣자 집에 다달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자 조금 먼저 내려서 뒷좌석의 짐을 손에 든 그가 현관을 향해 걸었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양을 샀다거나 한 것은 아닌데 왠지 그의 손가락에 간당간당 걸려있는 마트의 비닐 봉지가 무거워 보였다.
"그냥 내가 들어도 돼."
"아니야. 내가 들게. 어서 문 열어줘."
그는 포로로 뛰어서 현관을 열었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휘청거리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열이 있어서일까, 그가 열이 있어서일까. 식탁 위에 비닐 봉지를 내려놓자 그가 다가와서 사온 것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윤석, 배고프지? 어제도 죽 밖에 못 먹고.. 그러고보니 힘도 하나도 없을 텐데 부려먹었네."
"네 말 들으니까 배고픈 줄 알겠다. 배고파."
"御免ね。ちょっと待って下さい。"
그가 방에 가볍게 달려 들어가서 간단한 트레이닝 바지와 가로줄무늬-다소 꿀벌 컨셉-인 카디건을 노란색 바탕에 외국말-영어는 아닌 것 같은-이 뭐라고 뭐라고 크고 굵직한 글씨로 가득 적혀 있는 티셔츠 위에 걸쳐 입고 나왔다. 멈추지 않고 직진해서 냉장고 옆에 있는 좁은 수납장의 서랍에서 손바닥 크기로 접힌 앞치마-그의 말로는 무슨 '피터래빗'인가 하는-를 꺼내어 둘렀다. 그 아래로 뭔가를 더 뒤적이더니 그가 좋아할 것 같은 색의 앞치마를 꺼내 와서는-허리 아랫부분만 있고 끈이 긴-앞치마를 내 뒤에 선 채로 한 바퀴 돌려 앞부분에서 묶어주었다. 매듭이 잘 안 보이는지 어깨에 턱을 괴고 꽤 단단하게 매었다.
"배고프다고 했으니까 빨리 먹으려면 조금만 도와주세요."
"응."
"배 집어넣어. 아저씨도 아니면서 무슨 배가 이래?"
갑자기 무방비 상태였던 배를 '흡!'하면서 집어 넣었더니 턱을 괸 채로 웃는 게 어깨로 느껴졌다.
"다 묶었다. 양파 껍질 좀 까주세요-"
괴었던 턱을 떼면서 스치는 그의 머리칼 때문에 간지러운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길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내가 껍질을 벗겨준 양파와 감자 껍질 벗기는 칼로 벅벅 긁은 당근은 그가 유학 생활에서 갈고 닦았다는 기술로 모양 좋게 썰렸고, 홈쇼핑을 보다가 넋을 잃은 상태에서 주문했다는 주물 팬에 적당히 볶인 뒤, 그 동안 끓인 닭육수와 월계수잎과 함께 끓여졌다. 그가 생크림과 버터를 넣고 계속 저어가며 끓이는 모습을 홈바에 앉아서 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불렀다.
"윤석 군, 간 좀 봐줘."
"응."
가까이 가자 앉아 있을 때에는 전혀 알 수 없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런 곳에 잘도 서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스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작은 접시에 받쳐들고 '아-' 하고 말했다.
"뜨겁지 않아?"
뭔가 어린애 같은 내 질문에 대답없이 '호- 호-' 불더니 다시 '아-'했다. 뜨거운 음식에 유독 약하기 때문에 한 번 멈칫 했지만, 그가 뭔가 요구하면 사고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통에 별 생각 없이 받아 먹었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맛.
"어때? 맛있어?"
"맛있어."
"간은?"
"좋아."
"다 됐다. 이제 얼른 먹자."
싱긋과 머리 쓰다듬기 콤보 공격. 내가 하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잘 하니까 그도 나를 어린 애 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바게트 꺼내서 저기에 담아줘."
스프를 그릇에 담으면서 턱끝으로 가리킨 곳에 작은 캐러멜색 바구니가 있었다. 빵을 봉지에서 꺼내서 적당히 담고 식탁에 놓았더니 그가 스프 그릇 두 개를 쟁반에 올려 가져왔다. 식탁에 유리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놓은 그가 나의 대각선 방향에 앉았다.
"戴きます。내 구경 그만하고 드세요."
또 그를 빤히 보고 있었는지 핀잔을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스프를 먹었다.
"이건 이 용도."
그가 빵을 적당히 뜯어서 스프에 찍더니 또 '아-'했다. 진짜로 어린 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재촉했다.
"손 부끄럽잖아. 아-."
그가 미간을 밉지 않게 찌푸리며 말하자 더이상 저항할 생각 따위는 언제 있었냐는 듯 날아가고 냉큼 받아 먹었다.
"잘 먹네요. 윤석 어린이."
쿵.
역시나 였구나.
아주 엉덩이라도 토닥토닥 해줄 태세인데, 이건.
"응? 갑자기 왜 안 먹어?"
"아.. 아니야."
큰일이라도 난 것 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에 다시 '싱긋 빔'을 쏘는 그.
"감기에는 chicken soup이라고 미국에서 너무 못이 박히게 들어서 그런지 이걸 먹어야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먹고 또 먹어."
뭔가-멍한 게 아니라-먼 표정을 지은 그가 다시 싱긋 웃었다. 바보같이 잠깐 굳었다가 그가 싱긋 웃자 베시시 따라 웃어버렸다.
"뭐야, 윤석 군. 그런 웃음은 바보 같잖아."
웃음을 터뜨린 그가 비로소 안심된다.
스프를 다 먹어서 그런지 온몸 구석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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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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