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
나는 어느 새 테이블 가득 양주가 놓인 고급 룸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정현을 마주 한 채…….
방음이 철저하게 된 붉은 벨로드 벽........
기백하는 크리스탈 조명들......
완벽하게 꾸며진 테이블......
퇴폐적이지 않고 정중하게 시중을 드는 사람들........
마치 네 집사람을 대하듯 편안한 너의 매너.........
그래 넌 이런 분위기였지…..
항상 제일 좋은 것만 갖고……누구든 제 손에 쥐고서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태생부터 최고급인 녀석.…..
“뭐??”
맥주 한 컵에 양주잔을 떨어뜨리며……
너는 마치 어제의 너처럼 자연스럽게 내 앞에 앉아있다.
“너 부자잖아……. 그런데 왜……… 돈 받고…………. 다른 사람과 잤냐??”
차마 다시 ‘몸을 팔았냐??’는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감히 그를 모욕한 그 말을 다시 내 입에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뭐야?? 그것도 알고 있었어??”
놀랐다는 말투였지만, 너는 여전히 인형처럼 웃고 있었다.
“………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됐니?”
돈은 넘칠 만큼 많은 너였는데, 너랑 하룻밤을 자려고 줄 선 아이들이 네 돈 만큼이나 많았는데……
넌 널 사랑하는 나를 두고 왜 네 몸을 팔았던 거냐??
너에 대한 이야기는 널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부터 귀를 막았었다.
나를 만나기 이전의 네가 누구든 간에…… 날 만난 이후의 너는 온전히 내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너의 결혼식이 끝나고……..
아파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은 너를 욕했다.
그 때 알았다.
온전히 내 것이라 믿었던 네가 나를 농락하며, 심지어 필요없는 돈마저 받으면서 다른 남자들과 놀아났었다는 것을 말이다.
믿지 않았다.
그래 믿지 않았다.
네가 내게 돌아오기 전까지……..
다른 남자의 흔적이 가득한 몸으로….. 웃으며……나를 사랑한다 말하기 전까지……….
그런데………
너 왜 그 때처럼 웃는 거냐??
그렇게 맑고 깨끗하게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뉘우치는 기색없이 당당하고 순백하게……
되려 나를 나무라듯 그렇게………..
“특별…….. 해지고 싶었으니까…..”
침묵 속에…. 기다리고 기다렸던 대답인데.....
아주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정현을 멍하니 쳐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별??
몸을 팔아서 특별해진다고??
니 가치를 그렇게라도 확인하고 싶었다는 뜻인 거야 지금??
널 사랑하는 그래서 아무 것도 못보는 나를 기만한 것이..........
널 특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고??
"............ 날...... 그렇게까지 우롱하고 싶었니??"
정현을 향한......
내 최초의 적의에도.......
정현은 그냥 방긋 웃어 버리며 내게 그가 만든 잔을 건네줄 뿐이었다.
들끓어 오르는 분기를 잠재우기 위해 나는 낚아 채듯 잔을 들을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식도를 타고 내리는 뜨거운 기운이 나를 더욱 울컥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넌...... 여전히 곧기만 하구나.........."
"뭐??"
"그래........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어........ 넌 너무 바르고 곧아서...... 널 볼 때면 나는....... 나 같은 녀석은....... 정말 더럽고 추잡해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었어...."
여전히 인형처럼 웃으면서........
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지금??
".......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너무 따뜻했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추웠는지 비로소 알게 됐었지........ 네가 너무 곧아서 난 내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네가 날 너무 사랑해서 난 항상 불안했어!!"
무슨 소리야.......
나 모르겠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돼........
그런데........
그런데........
너 왜 울 것같니??
넌 한 번도 운 적이 없잖아.........
마치 눈물따윈 모르는 인형처럼.........
"알아?? 난 늘 불안했어....... 언제 네가 날 더럽다고 할지....... 그래서 날 버리면 어떡하지?? 잠든 네 얼굴 보면서 늘 가슴을 졸였다고!!"
너 왜 울지??
왜 그렇게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 치는 거야??
넌 그 어느 순간도 망가지는 너 자신을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이었잖아!!
너 왜 그래??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사랑해서 불안했다니?? 아니!! 그렇다 해도 그게 내 뒤에서 아무 남자나 놀아난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해??"
너 그러면 안돼!!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데.......
얼마나 원망했는데.....
너 그렇게 무너지면 안돼........
그러면 난 어떡하라고.......
네가 아니면.........
그 오랜 시간의 아픔은 무엇으로 설명하라고!!!!!!!!!!!!!!!!!
"돈을 받고!! 네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하고...... 그래도!!"
".........."
"그래도......... 네가 날 사랑해 주길 바랬어........... 내가 아무리 더럽고 천박한 짓을 하더라도.......... 너는 날 사랑해 주니까...... 너한테 난 특별하다고..... 그렇게 안심할 수 있었어........ 사랑했어...... 아니....... 사랑해!!"
맙소사.........
너 누구야??
도대체 넌 누구지??
넌 내가 알던 정현이가 아니잖아..........
그렇게 도도하게.......
그렇게 천박하게..........
나를 비웃고 돌아서던 그 정현이가 아니잖아..............
네가 이러면..........
이렇게 무너지면.............
도대체........ 도대체...............
난 이제껏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윤석아........... 윤석아...............흐흑................"
오 하나님.........
전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던가요??
그토록 사랑한다 했던 그 연인의 마음 하나 읽지 못하고.............
내 멋대로 화내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면........
그저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밖에 하지 않는 그런 놈이였다니..............
제 굴레에........ 그것도 내 손으로 만든 굴레에 갇혀........ 겁쟁이처럼 내 상처에만 눈이 멀어......네가 상처 입은 것도 못 보고...........
그를............ 민규를......... 그 어여쁜 이를......... 모욕하고 상처 내다니............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윤석아.......... 알잖아........... 응?? 나 너 사랑하는 거............."
마치 데자뷰 같다.....
그런데....... 어째서 네 모습이 이렇게 다른거지??
너 그렇게 울면 어떡해..........
이미 늦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 없는데............
"나 돌아갈래........ 너한테 갈래........ 응?? 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네 사랑 시험하지 않을게....... 5년이야........ 5년 동안 나 벌 충분히 받았잖아... 나 이제 용서해도 되잖아?? 응??"
애처롭게 내게 매달리는 네가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
여전히 꽃잎처럼 예쁘고 부드러운 입술이라서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데 이상해.......... 이상하다........... 정현아.........
너 왜 향기가 없니??
너 왜 달콤하지가 않아............
나 늘 네 달콤함을 잊지 못해서..............
네 독에 죽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정현아...........
정현아.............
네 향기는 어디로 간 거니??
너 이렇게 내 품에 가득 안겨 있는데........ 난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내 코에 감도는 이 향기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 거지??
[미안.............]
[......]
[안돼.............. 안돼.. 정현아....... 넌 이미 가정이 있고..........]
[정략결혼이었어........ 이혼해도 상관 없어!!]
[아....... 아니...... 미안......... 나 또 도망치려 했다............ 미안........ 또 니 핑계 대려고 했어.........]
[윤석아.........]
[미안.......... 안 되는 건 내 마음이다............ 정현아.......... 미안......... 여기에......... 이곳에.............. 뭔가 박혔나봐....... 계속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도망쳤는데............ 미안........... 이미.......... 나도 모르게......... 여기 이곳에......... 누군가 박혀버렸나 보다...... 그래서 안돼...... 바보 같이 상처만 주고...... 너한테처럼 사랑해주지도 못 하고............. 계속 나 때문에 울게만 만들고.......... 한 번도 제대로 웃게 해준 적도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여기 박혀서... 이젠 어떻게 빼는지 모르겠다.... 미안.......... 이젠 안돼......... 내 마음이...... 이젠 안 된데..............]
정현이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 아직 메아리 치고 있다.........
결국 제일 나쁜 건 나였다.
사랑한다는 그 마음만으로 교만해서..........
상처 받는 정현을 보지 못했다..........
내가 하는 사랑이 너무 고결해서.............
내 사랑을 받고 힘겨워 하는 정현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원망하다니........
미워하다니...........
내가 아파했던 것은....... 결국 완벽하리라 생각 했던 내 사랑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란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다니............
나란 놈이 이렇게 못났다니...........
이런 놈이라니...........
"하아............ 하하................."
옛 설화의 김유신을 태우던 말도 아니고...............
어째서 술취한 내 발걸음은 항상 여긴 거지??
그렇게 상처주고..........
그렇게 울게 하고.........
난 도대체 무슨 낯으로 너를 대하려고 이 곳에 온 것일까?
초인종을 누르면........ 너 전처럼 그렇게 예쁘게 웃으며 맞아줄까??
술 취한 척......... 네 집 문을 두드리면.... 조금 짜증내면서도......... 그래도 내 팔을 잡으며 날 지탱해줄까??
"사랑해............."
네게........ 이 말을 할 자격에 내게 있을까??
주민규.........
민규야..........
내가........
이런 내가.............
널........... 사랑해도 될까??
다음날 새벽..........
미련스럽게 초인종도 누르지 못하고 우두커니 민규네 문 앞을 지켰지만...........
결국 민규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민규네 집은 열리지 않았다............
마치 내게 영원히 닫힌 것처럼................
"기사가 잘 나왔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황 기자님!!"
"별 말씀을 다...... 제가 잘 보여야죠..."
"무슨... 펜 하나에 살고 죽는 게 우리 정치인 아닙니까?? 모쪼록 서로 좋은 기사만 나게 노력합시다.."
"예....... 그래야죠........"
민규네 의원이 감수하던 특집기사가 마무리 되고, 나름 괜찮은 반응을 보인 탓인지, 한턱을 쏘겠다는 박 의원의 말에 의원실을 찾았다.
몇 날 몇 일을 민규네 집앞에서 기다렸지만 결국 민규는 돌아오지 않았고, 민규를 볼 수 있는 곳은 결국 의원실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나란 놈이 어떤 사람인지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안 된다고.......그럴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날 막으려 해도..............
마음 한편에서......... 이렇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도망치는 거냐고......
그랬다......
난 정현이를 핑계로........ 내 상처를 이유로.......... 민규에게서........ 새로운 사랑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그 옛날........
나는 온전히 정현을 감싸주지 못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면서....... 그를 보듬는 대신 눈을 막고, 귀를 막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더이상 도망칠 수 없다........
돌이킬.........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아니...........
꼭.....
꼭.....
꼭.....
붙잡아야 했다............
박 의원이 마련한 자리에는 생각지도 못한 정현이네 일행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민규가 있었다.
하지만 마치 처음 그 때,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그는 차갑고 냉정하게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도무지 민규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술자리에서 조차 곁에 앉으려 해도......
스토커처럼 화장실 까지 따라가도.........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막으로 감싸인 것처럼 차갑게 나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조급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정말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모욕을 퍼부었으니까........
그것이 비롯 주체하지 못 한 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민규는 자신의 의원에게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왜냐고 묻는 의원에게 민규는 희미하게 웃으며 조금 불편하다고 말했다.
하얀 얼굴이 어쩐지 더 하얗게 질려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가 나가고, 나 역시 박 의원에게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급하게 민규의 뒤를 쫓았다.
한 마디라도.......
사과만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금방 사라져버린 민규의 자취를 쫓아 조금 달렸어야 겨우 주차장 어느 한 구석에 벽을 짚은 채 비틀거리는 민규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거 놔!!"
비틀거리는 민규를 보자 몸이 먼저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내 얼굴을 알아 보는 순간, 그는 매섭게 나의 손을 쳐내고 있었다.
"민규야........"
"왜?? 무슨 할 말이 더 있는 거지?? 나같은 남창에게 아직 볼 일이 남았던가??"
"아냐!! 그런 게...... 미안.......... 막말이었어........ 미안......... 그저.......... 그저......."
민규의 얼굴이 나에 대한 분노와 모멸감으로 하얗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내 손을 뿌리치려는 민규의 팔목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말해야 했다.......
"그저 뭐?? 아니..... 상관 없어.......... 상관 없어 이젠........ 내 옛사랑이....... 네 눈에 겨우 남창으로 보였다 해도..........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뭐라고......."
"민규야...... 제발........ 그런 게 아냐........"
하지만 너무도 분노하는......... 상처 받은 민규의 이지러지고 있는 구슬 같은 눈동자에 나는 더듬, 급한 마음으로 민규의 손목만 아프게 쥘 뿐이었다.
"제발 뭐??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미안...... 미안해........ 용서해라........ 그건..... 그러니까........ 그건 그냥........ 질투였어......널 상처 입혀서..... 날.... 보호하려고 한거야..... 미안... 그렇지만.....민규야...... 나..... 널........"
빠앙......
정말 .......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막 우리를 향해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다가오는 고급승용차를 보며........
나는 마지막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
민규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목을 놔줄 수가 없었다.
"넌 그냥 그렇게 살아....... 옛 상처 안고.... 그걸 치료해줄....... 옛사람에게...... 돌아가........ 나도..... 그냥 이렇게 살 테니........."
하지만 그를 향해 돌아서서 내 손을 다시 한 번 뿌리치는 민규의 손길에..........
내 손은 또 내 의지와는 다르게 힘 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민규를 태운 차가 조용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다른 이의 곁에 앉아 내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전하지 못 했는데...........
아직 아무 말도 못 했는데.............
한참을 민규가 사라진 곳만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을 때.......
나를 향해 울고 있는 정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