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게 딱 요즘일까.
그 주말 이후로 세상에 이렇게 바쁠 수가 없다.




겨우..
조금이나마 황윤석이라는 사람과 사생활을 공유하는 부분에 있어서 반감을 덜어냈더니 바쁘다고는 하지만 2, 3주 동안 전혀 연락이 없었다.




그가 내게 보였던 여러 표정들이 잠시 잠깐 스칠 때마다 마치 동생이 나를 찾으며 소리를 질러댈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기만 했다.




처음 본 그는 내 어이 없는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쾌감에 젖은 표정, 그리고는 평온했던 의외의 모습. 비열하게 협박하던 표정도 있었다.





그리고.



그래, 사실 여러 표정이 스쳤다기보다는 그 참담했던 표정만이 반복해서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나따위와 섹스를 한다는 게 참담하다는 걸까?
아마도 그는 내가 아무하고나 뒹구는 족속인 줄로 아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라면 굳이 나랑 잘 필요까지는 없었던 거 아닌가..



모르겠다.


몇 번을 묻고 대답해봐도 그가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 수가 없는 것은 내게 그렇게까지 대했으면서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느냐는 거다.
여러 모로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Rrrrrrr..



"네, ○○○의원실 주민규 비서관입니다."
- .. 저기.. 황윤석 기잡니다.




그다.





".. 네.. 무슨 일이십니까?"
- 저번에 맡으셨던 특집 기사 건을 제가 인계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수해주시던 자료를..
"아, 네. 알겠습니다. 일단 최근 파일은 메일로 보내드리죠.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 아.. 저.. 음.. 이전 자료를 가진 선배가 지금 해외에 계셔서 못 받는데 혹시 이전 자료들도 좀 주시겠습니까?
"그건 좀 찾아봐야 하겠는데요."
- .. 그러면.. 제가 지금 가도 될까요?
"오시는 건 상관 없습니다만.."
- 알겠습니다.






일로 전화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왜 갑자기 존대를 하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사실 자료는 최근 계속 하던 일이어서 찾아볼 것도 없이 내 책상 한 켠에 있었다. 게다가 이런 경우엔 보통 팩스를 넣든지, 양이 많을 때는 퀵서비스를 불러도 되는데 굳이 온다는 사람을 말리지 않은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금은 궁금한 마음이 저지른 일이었다.





왜 멍하니 코 앞에 있는 자료를 쳐다보면서 찾아봐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인지 스스로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어차피 그가 와도 궁금한 것은 묻지 못 할 것이며, 또한 그런 일을 물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 밤, 내 행동을 알면서도 제어하지 못 했던 그 밤처럼 나는 또 스스로의 제어의 틀을 벗어난 모호한 행동을 하고 만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황 기자. 어서 들어와요."






조 보좌관님의 넉살 좋은 접대에 의원실로 들어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보고 음료를 준비해서 들어갔다.





뜻밖에도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아마 대학생 인턴이라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와서는 저번에 의원실에 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어색해 했다. 오히려 처음 온 사람들이 의원회관 안에는 처음 들어와봤다면서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이번 예비 총선 자료입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 하십시오."
"아.. 이 정도면 일단 충분할 것 같은데요.. 뭐 필요한 게 생기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나는 대개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호칭도 그렇고 말을 높이거나 낮추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고집을 부려봤자 어디 가서 쓸 데도 없다.


그렇긴 해도 이건 무언가 깔끔치 못 하고, 개운치 않다.
그와 통화할 때 멍했던 나만큼이나 멍한 그의 표정도 그렇고 말이다.





어디가 아픈가?
별 시덥잖은 생각까지 다 든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은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일할 때 눈치 없고 오지랖만 넓은 사람.
다른 하나는..






술 취한 사람이다.
술에 취해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 하는 사람.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무책임해지고 난폭해지고 멍청해지고 저질스러워진다.




마치 그 인간처럼.











자다가 초인종 소리와 동반된 발로 문을 쾅쾅 차대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웬 취객이 행패인가 싶지만 경비 아저씨가 계신데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들어왔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문에 난 구멍으로 바깥을 살폈다.




아까 낮에 당사에서 분주하게 취재하던 황윤석이었다. 나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우리 의원님한테는 말도 잘만 걸던 그였다.






문을 여는 순간 훅- 끼치는 술 냄새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나도 취한 상태라면 모를까, 멀쩡한 상태에서 맡는 술냄새는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나에게는 무조건반사적인 방어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안으로 제대로 올라오지 못 하고 넘어지려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 그 정도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실내로 들어와서 긴장을 풀어버린 것 같다.




"좀.. 몸을 가눠봐요.."





그의 손이 갑자기 내 옷 속에 파고든다. 고개를 묻고 있던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끔찍한 기분에 몸서리가 쳐진다.






"저리 가!"







나도 모르게 그 인간에게는 제대로 해보지조차 못 했던 저항을 한다는 게 그만 그를 저만치로 떠밀어버렸다. 그는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악몽 같은 그 기분이 떠올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팽개쳐진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앉아 있기만 한다.



혹시..?











큰일이 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얼른 그에게 달려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행히 어디가 크게 다치거나 아픈 건 아닌지 호흡도 비교적 규칙적이고 맥박도 정상이다. 하긴, 그는 알콜 중독자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들어올 때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끈을 놓은 건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겨우 겉옷만 주섬주섬 벗겨서 침대로 끌고 가서 눕혔다.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이 마치 그 때처럼 나는 당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건에 물을 묻혀서 얼굴이며 손발을 닦아주는데 꾹 감고 있는 그의 눈 때문에 잔뜩 찡그려진 미간이 눈에 띈다. 또 다시 보는 그의 이 표정.




수건을 다시 빨아와서 손을 닦아주는데 그가 손을 잡아 끈다. 무게중심이 쏠려 그만 그의 위로 쓰러지고 마는데 그가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아.. ㅎ.. 혀.. ㄴ아.."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다. 술 취해서 헤어진 옛 애인 이름이나 부르다니.






".. ㅎ.. 혀.. 나.. 저.. ㅎ.."




물수건 때문에 옷이 젖어들기 시작해서 몸을 일으키려니까 그가 더 강한 힘으로 끌어안는다.






"가.. 지 마.. 현아.. ㄱ.. 혼하ㅈ.. 마.. 정현아.. 으..?"






피곤해서 무거웠던 머리가 한 순간 개운해지는 듯도 싶다. 그의 표정이 참담한 이유라는 것.


물수건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이불을 잡아당겨 함께 턱밑까지 덮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잘 모른다. 그냥 언제나 불쌍한 내 동생처럼 그가 안쓰럽다.

그를 버리고 결혼까지 한 건 대체 누구일까 하는 쓸 데 없는 궁금증도 생기지 않을 만큼 처참한 그의 슬픈 표정이 견디기 힘들다.








새벽만의 독특한 한기가 느껴져 잠에서 깨어버렸다. 깊은 잠에 못 들었던가보다. 한쪽 눈만 억지로 밀어 올리고 보니 그가 일어나서 내가 걸어둔 자신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뭐예요.. 도둑처럼 나가고.. 밤에 갑자기 인사불성으로 들이닥치더니.."
"아.. 깼어요..? 미안합니다."
"운전을 하고 왔을 것 같진 않고.. 이 시간에는 차 안 다녀요.."




말 해놓고 얼른 시계를 봤다.
혹시 그를 더 붙잡아두고 싶은 것 같이 비칠까봐 걱정되었다.



새벽 세 시 사십 분.
아슬아슬하게 그런 오해는 안 사도 될 것 같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연다.








"아, 대리운전 부르려고요.. 술 먹은 데가 멀지 않아서요.."
"물이나 마시고 가요.
".. 네.."






물을 유리컵에 따라주고 꿀꺽꿀꺽 물을 들이키는 그를 가만 쳐다보았다. 저렇게 목 말랐으면서 그냥 가려고 했단 말이지.







"잘 마셨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실수 많이 하셨어요. 저한테 많이 미안하셔야 돼요."
"예?"






아마도 내 표정은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할 것이다. 그의 표정 변화는 꽤 볼 만하지만 말이다.






"누굴 그렇게 자꾸 불러요. 자는데 시끄러워서는."





그래, 얼마쯤은 심술이 섞였다고 해도 변명할 말은 없다. 지금 내 처지가 뭐라고 그에게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나의 가장 큰 약점을 쥔 사람인데.




그런데.
당연하지만 다음 순간 난 바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






"윤석 씨, 미안해요. 나는 그냥.."







그가 어색하게 동작을 뚝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데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눈에 보여버린 것이다.








"저.. 기.. 정말 미안해요.."







다시 돌린 그의 표정은 눈물의 흔적따위는 없었지만 다시 예의 참담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미안하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는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돌아섰다.







"조심히 가세요. 흡."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서 부딪치듯 키스를 해왔다. 그가 허리와 뒷목을 감아 끄는 바람에 방에서 내려와 그의 발위에 서서 키스를 받아내고 있다. 그의 옷에서 아직도 약하게 풍기는 술냄새가 생각처럼 역하지 않고 오히려 알싸한 느낌이다. 조금은 성급하고, 공격적이었던 시작과 달리 그의 키스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내 손가락이 그 머리카락 속을 파고든다. 꼼꼼하고 다정한 그의 키스에 몸이 따뜻해지면서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다. 놀라서 빨리 뛰던 심장도 진정된다.




한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키스를 멈추고 그가 입술을 뗀다.










"미안해요."






그리고 주제 넘는 내 말도 이어진다.






"그냥.. 그 사람의 인생은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버리세요."







나조차도 하지 못 하는 일을 그에게 충고처럼 떠벌리다니..











취했던 건 그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highen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