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물어볼 말 같은 것은 없다……….
제 할말만 얼음처럼 똑똑 내뱉어버리고 냉정하게 끊어버리려는 그가 얄미워서 조금 부려본 심술 같은거랄까?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건 아니지만, 그를 다시 만나고 뭔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냉정하기 그지 없는 그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작정 나온 말이었다.
“휴…..”
넥타이가 없음에도 목이 졸린 느낌이다.
다른 이들처럼 이런 때 담배라도 하나 물면 나아질까.. 하는 유혹도 가끔 있지만, 풋…… 나한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목이 아프다…..
어린 날의 치기가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 있는 셈이지만, 요 근래 잊고 살았다면 잊고 살았던 그 사실들이 왜 새삼 날 동요시키는지 모르겠다.
주민규…….
주민규라………
아무리 게이들을 위한 바로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앞에서 대담하게 옷을 벗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보통 나를 보면 많이 놀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의 난 꽤나 보수적인 사람이라, 내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내가 게이라는 사실보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에 더 놀랐었다.
그런 내 앞에서 옷을 벗다니…. 큭큭…… 만약 내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지도 모를 행동이었지만, 확실히 그 날 나는 나답지 않은 거였다.
원나잇스탠드라….
가끔 몸이 너무 외로워서 그런 생각들을 해본 적이 없지 않지만, 정말은 주민규, 그가 처음이었다.
미련스럽게 한 사람만 보는 내가 스스로 답답해서 밤거리를 헤맨 적에도 결국은 그 누구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내 앞에서 옷을 벗고 유혹하는 그를 냉큼 안아 들고 달려 나갔다는게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 하지만…….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그와의 기억들에 가슴 어딘가가 가볍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건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설레임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이런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오래 전에 묻어 두었던 해묵은 기억을 뒤흔들고 있는 것인지…….
주민규…. 그는…… 어째서 날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려갔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봤을 때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않는 그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내보이는 사람인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처음 만난 날 뭘 믿고………
그래 놓고……
또 왜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걸까?
대담한 유혹….
자신의 오피스텔…….
정성스러웠던 섹스……
예기치 못한 재회…….
냉담……
그 모든 것이 어쩐지 전혀 짝이 맞지 않는 퍼즐과 같다………
저것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출만한 조각이 있을까??
예를 들면…….. 마.. 음이나…….운.. 명…… 같은 거…………….?
“이 질문들에 대해서만 답을 준비하면 되는 겁니까??”
“아……. 네. 하지만 인터뷰 당일에 또 다른 질문이 추가 될지도 모릅니다…….”
“네.. 일단 의원님께 전달해 드리죠…. 그리고 인터뷰는 수요일 2시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가끔은 기자라는 직업이 나한테 맞지 않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극악한 범죄라든가… 안타까운 사연 같이…. 감정이 먼저 쏠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는 기자로써의 중용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쉽게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내 앞에서 여전히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차분차분 자신의 일을 처리해 가는 그를 보며 나는 또 멍청하게 그의 자취만을 눈으로 쫓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말해보세요”
“네??”
“제게 묻고 싶은게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실은 그 전화를 끊고 이틀동안 그에게 질문할 거리를 생각했지만 도통 달리 무얼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궁금한건 있는데 말이다……..
“아 저……”
당황하는 나를 눈치 챈 듯 그의 눈썹 꼬리가 날카롭게 끌어 올려졌다. 당장이라도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은데, 생각과는 달리, 무슨 생각인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얼굴이다.
얼굴선 하나하나 다 뜯어 놓고 보면 날카롭기 그지 없는 사내이건만, 전체적인 그는 여리고 새침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달리 할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조금 짜증이 난 듯 탁자를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아…… 저기 사귀는 사람이 있나요??”
갑자기 이 말이 왜 튀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얀 그의 손등에 장식이라도 끼워져야 할 반지 하나 없는게 이상해서 튀어 나온 물음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비어 있는 그의 손등을 보며 어딘지 안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네??”
그의 미간이 조금 더 짜증난다는 듯이 모아 졌지만, 그러고 보니 그의 무표정을 깼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계속 나만 바보처럼 그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귀는 사람이 없겠죠?? 그러니…… 까…. 나와…….”
아 뭔가 핀트가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그도 뭔가 내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가 하는.. 그래……..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조금은 유치한 질문…….
“이봐요 황윤석씨…”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는 그의 말투가 날카로워 나는 조금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먼저 이야기 해둬야 할 것 같군요….”
“무슨?”
“피차 책임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만한 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네?”
“분명 다시 만난 건 뜻밖이고 당황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날 밤 일이 우리 사이에 뭔가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원나잇스탠드였고, 더 이상 이야기한다면 왠지… 지저분해질 것같군요….”
“………..”
“무슨 뜻인지 아셨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푸훗………
하하하하하……………. 하하……………….. 하……………….
내가 그렇지 뭐……
나란 놈은 참 쓸데없는 데서 순진해서 늘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거다.
도대체 난 뭘 생각했던 걸까??
도대체 뭘 바라고 그를 마주 했던걸까??
어차피 인간이란 다 그런데……….
나같지 않은걸………..
그렇게 징하게 당해놓고……….
그 얼굴반반한 주민규에게 뭘 바라고 그렇게 바보 같이 굴었던 걸까??
마음이라……..
운명이라니…..
한심한 나는 20살이었을 때나 26이 되어서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거냐 말이다………
하하………하하………………..하……… 젠장…………..
[ 너 왜 이렇게 순진해??]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잖아!!]
[내 인생에 사랑이 의미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지금!!]
[똑바로 봐!! 사랑따위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꿈 깨!! 그냥 즐겨……. ]
[알잖아?? 나 너 사랑하는거……..]
으아아아아악!!!!!!!!!!!!!
목이 찢어질 것만 같다.
잠도 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어째서 이렇게 지독하게도 지워지지 않는 건지…………..
쿵. 쿵. 쿵.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도 …….
목구멍이 찢어져 피가 나도록 소리질러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바보 같은 황윤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자 많이들 들어요….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잔을 높이 드는 의원의 손짓에 따라 건배를 소리 높여 부르면 여기저기 잔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인터뷰를 끝내고, 의원일행의 회식자리에 우리까지 초대된 것이었다.
“황기자님 기사 잘 부탁드려요”
“하하….”
내게 잔을 건네며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농을 건네는 의원에게 원샷한 잔을 돌리며 낮게 웃었지만, 옆에 앉은 카메라맨과는 달리 나는 그렇게 즐겁다고 할 수 없었다.
내 맞은 편에 단정하게 앉아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서 쉽게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 난 바보였던 거다.
그렇게 혼자 삽질을 해 놓고도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재수없었다 내가 그렇지 뭐…. 웃어버리면 되는 것을……..
어째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인지……..
도무지 그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유치한 짓인줄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용서할 수가 없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렇게 사람 마음을 하찮게 짓밟는 거냐??
그 아름다운 얼굴로 사람을 홀려 놓고 마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시하는 것인지….
그 알량한 지위나 명성이 인간의 진심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 것이기에 이렇듯 간단하게 비웃을 수 있는 것인지……..
젊은 사람들끼리 놀라며 의원과 함께 보좌관이 떠난 자리에는 위원회 사람들과 우리 팀까지 여남은 명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정치부에서 일하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 부딪히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라 제법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법 붙임성 좋게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였지만 나와는 역시 단 한 번도, 술잔조차 마주치치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도 나만큼 유치한 사람이군………..
피식 웃음이 났다.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그럴수록 내 속에는 이유를 말할 수 없는 분노가 고요히 쌓여 가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무엇을 향한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노여움이 말이다.
꽤 많이 술잔이 돌았을 때, 그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어딜가냐는 옆사람에게 화장실이라고 말하며 살풋 웃어보이는 그는 그 날만큼은 아니지만 꽤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일까? 아님 불행인가?
그가 들어선 화장실에는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려는 듯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화장실 문을 잠그었다.
딸칵….
생긴 것만큼이나 예민한 그는 문이 잠기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알아보자마자 불쾌하게 일그러지는 미간……..
어쩐지 즐거웠다.
“무슨 일이죠??”
날카롭게 물어오는 그를 향해 나는 조금 웃어 보였다.
그 누군가 난 입만 다물면 사람 12은 눈으로 죽일 수 있을 거라던 말이 떠올랐다.
쿡쿡…….. 나 원래 이렇게 유치한 사람이었나??
하지만 제법 마신 술 때문인지, 유치한 짓이란 것을 알고도 그만두지는 않았다.
역시나 그는 다가서는 나를 날카롭게 마주볼 뿐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나도 마음 편하게 널 가지고 놀 수 있겠지…….
여기서 당황한다면 난 바보 같은 놈이라 또 흔들릴지도 모르는데 말야……..
“그저 조금 확인하고 싶어서 말야……….”
그의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듯 조금 파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코끝이 마주 닿일 듯하자 그가 한걸음 물러섰다. 조금 더 즐거워졌다.
단 두 걸음으로 그의 등이 벽에 닿이고, 그제서야 그는 마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돌려 나를 지나쳐 나가려고 했다.
“윽…..”
그의 얼굴 앞으로 팔을 뻗어 그가 나가는 것을 막았다. 아예 양 손으로 그를 가두듯 벽을 짚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의 파란빛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비켜요.”
“싫은데…..”
“정말……. 한심하군요…….”
그의 경멸에 가득찬 말투에도 나는 그저 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그의 매끄러운 뺨 위로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손등으로 아주 살짝,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건만 보드러운 그의 피부는 비단마냥 미끌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예쁘다……”
화를 참는 듯 입술을 깨어 무는 그의 작은 동작마저도 피어나는 꽃잎처럼 화려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예쁜 것들은 다 그러냐??”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처럼 가볍고 헤픈 사람을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죠??”
“아무 것도 아니야…… “
“취했군요… 그만 비켜주시죠??”
“아니… 그 날의 반의 반도 마시질 않았거든?”
내 입에서 흘러나온 그날의 일에 그의 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것 봐요!!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군요!! 이러면 서로가 곤란해지는 걸 모르진 않겠죠??”
날카로운 목소리가 중성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젠장, 그는 너무 아름다워서 화가 날 정도 인 것이다.
“아니…….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게 많은 법이지……. 곤란해 지는 건 나라기 보다… 당신.. 아닌가??”
“뭐.. 라고??”
“기자 나부랭이와 국회의원 비서관… 둘 중에 누가 타격이 클 것 같아?”
“당신!!….하….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한심해”
그의 눈 속에 파란 불꽃이 번뜩 였다. 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내 팔을 쳐 내며 몸을 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무작정 헤집고 들어간 그의 입술은 달콤하기 그지 없어서 마치 꿀 같았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장미의 가시처럼….
이 꿀처럼 달콤한 그의 입술은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한 번 바닥을 친 나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거세게 반항하는 그의 팔을 꺽어버리고 멱살을 더욱 거세게 틀어 쥐었다.
목이 죄여 서서히 붉게 변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숨이 막혀 가빠지는 그의 숨결을 남김없이 빨아 들였다. 다리 사이로 문지른 내 무릎에 서서히 반응하는 그는 빼앗긴 호흡 탓에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아……학…..”
막 바닥에 주저 앉으려는 순간, 그의 멱살을 풀고 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내 앞섶을 쥐고서 온전히 내게 기대어서만 중심을 잡은 그의 앙증맞은 귓가로 입술을 가져 갔다.
“남자가 필요하지??”
최고급 수트에 감싸였지만, 육감적이기 그지 없는 그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움켜 쥐며 나는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았다.
“전화 하지………”
허리를 감은 손을 풀자 간단히 무너져 내리는 그를 내버려 두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문옆에 기대서서 멋대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웃음 같은데……. 손 아래 내 얼굴은 가면처럼 딱딱히 굳어 있었다.
어쩌면….. 그 밤…….. 혐오스러웠던 것은 나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