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환민매니아
창백한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분명 놀람을 넘어선 두려움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서관 주민규라고 합니다.”
악수를 청하며 자연스럽게 떨어진 그의 시선을 쫓아 나의 시선 역시 내게로 내밀어진 그의 하얀 손으로 향했다. 손등이 더 많이 보이게끔 내밀어진 그 손은 당연히, 평생 궂은 일 한번 하지 않았을 뽀얀 손등 위로 사내다운 섬세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다 혹은 차갑다 말하기 모호할 정도로 미지근했지만, 나를 내하는 태도는 확실히 오늘 처음, 이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했다는 것처럼 공손했고, 사무적이었다.
이런 자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게이였고, 연인보다는 하룻밤의 관계를 더 쉽게 접하게 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 말이다. 상대가 누구였든 간에, 어쩌면 이렇게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다면- 이라고 가정할 때면 나는 으레 지금의 그처럼 쿨하게 또는 점잖게 행동하리라 생각했었다.
“처음, 뵙습니다. 황윤석입니다.”
그러나.
다소곳이 내려 깐 눈썹 끝까지 조금의 떨림도 없는 그와는 달리, 바보처럼 뜻도 모르는 사람마냥 그의 말을 되풀이 하듯 ‘처음’ 이라는 말을 중얼거린 내 목소리는 기자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제 페이스를 잃고 흔들렸다. 내게 자리를 내주고, 차를 권하는 그의 일련의 행동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고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흥분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와 나는 감정의 고리로 연결될만한 어떤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사무적인 태도는 옳은 것이었고, 오히려 동요하고 있는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설명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 아침.
비어 있는 옆자리를 내려다보며 실은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꿈에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무엇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면 동요는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동요라는 것이 이렇듯 정신을 몽땅 어딘가로 내보낸 것 같은 강도를 지니고 있는 이유만은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페로몬에 끌려 허둥거리는 일개미마냥 그의 몸짓에 따라가다, 어느 순간 내 앞에 놓인 커피의 따뜻한 향내가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낯설지 않는 얼굴로 완전히 낯선 태도를 정중하게 나를 대하는 그를 깨우치자, 마치 시간이 뭉뚱그려 사라진 것처럼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못 안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하아..........
물기어린 더운 숨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처럼 귓가에 부딪쳤다 사라졌다.
단정한 얼굴, 섬세한 태도, 완벽한 포커페이스.
완벽한 그의 앞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왔구나.”
“네. 아버지는??”
“안에. 주무신다.”
“네.”
일찍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주무시는 아버지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아 현관 바로 옆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섰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하나와 철이 바뀌어도 차이가 없는 무던한 침대시트가 깔린 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이지만,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은 사람을 늘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넥타이를 잡아 빼며 침대에 몸을 풀썩 던졌다. 주머니 속에 딱딱한 낯선 감촉이 느껴져 억지로 바지 주머니의 좁은 틈을 비집고 꺼내들자, 네 귀퉁이가 구겨진 하얀 명함들이었다.
국회의원 ○○○
점잖은 이미지를 추구한 듯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는 국회의원의 사진과 그 이름이 점자로 박힌 명함 한 장과 연락처와 주소가 박힌 명함 그리고 또 한 장.
마지막 손 안에 든 네모난 명함에는 얼굴은 알았지만, 이름은 몰랐던 그의 이름 석 자가 단정하게 박혀 있었다.
주민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확실히 난 취했어도 얼굴을 밝히는 타입이었던가보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예쁜 얼굴에 비해 수트로 감싸인 그의 몸은 꽤나 단단해 보이는 것이어서, 조금 놀랬다는 것도 인정한다. 기억 속에는 되게 가녀리다는 느낌만 남아 있었는데......
그 날의 그는 어땠더라.
요 몇 년간 그날처럼 그렇게 많이 취했던 적이 없었기에 더듬어 보려고 해도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새삼스러운 그의 이름 석 자도 실은 그날 그 밤에 그가 내게 말해 주었었는지도 모른다.
도무지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날의 나는 확실히 나답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막연한 나의 감일 뿐이지만..
그 역시 무엇인가 그 답지 않았던 거다.
“윤석아??”
“네??”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상념을 깨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결혼하고 독립해 버린 형을 생각한다면 어머니는 나이에 비해 젊은 얼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를 대하는 당신의 얼굴에는 애정과 함께 피곤.. 같은 것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녁은??”
“아.. 괜찮아요..”
“늦긴 했지만, 아직 저녁전이라면 조금이라도 먹어라.”
“아뇨.. 일찍이긴 했지만 먹었어요. 어머니..”
“일이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꼭 챙겨라. 알겠지? 그럼 쉬어라..”
기자랍시고 들고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은 나였지만, 어머니는 항상 걱정스럽게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기다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어도 어머니는 그러마- 말로만 대답하셨을 뿐,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야 방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품안에 자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버린 아들로서, 지극해 보이는 어머니의 애정은 당연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나가시고 굳게 닫힌 내 방문을 보고서야 옅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집’보다 방이 더 편한 이유 이면서, 동시에 독립보다 집을 택하게 만든 어머니의 조심스런 태도가 가끔은 숨 막히지만, 결국은 알고 있었다.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5년 전 그 때..
망가지는 나를 그대로 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무너져 내리는 아들을 붙잡아 준 것은 결국 가족, 그리고 어머니뿐이었음을..
어쩌면 끝내 어머니의 소박한 꿈마저 이루어드리지 못할 못난 아들이지만, 할 수 있는 한 어머니 곁을 지키고, 당신의 바람을 들어드리고 싶은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상념이 너무 깊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사람이란 생각만으로 지옥과 천당을 오갈 수 있으므로..
쓸데없는 생각 속을 헤매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생산성 있는 것이다.
복잡해지는 머리를 양손으로 마구 흩트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연예부에서 정치부로 넘어와서 처음 단독으로 맡은 인터뷰기사였다. 이 기사의 평점여부에 따라 정치부에 계속 남게 되든가, 아니면 그 지긋한 연예부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가가 결정이 나게 될 것이었다.
나름 기회도 좋았다. 총선시기가 가까워지는 만큼, 국회의원들은 홍보 겸 이런 잡지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 왔고, 한창 때와는 달리 조금은 예리하거나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도 웃는 낯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그 웃는 얼굴 아래서 끌어 낼 수 있는 것인가가 바로 내게 내려진 임무였다. 하지만 그들은 특히 권력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간단한 신변잡기적 인터뷰라도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고서 그들을 맞닥뜨린다면 훗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에 질문하나하나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 기획은 차기 주자들에 대한 정책 평가와 홍보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국회위원 역시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제일 먼저 열어본 메일함에는 역시나 그의 손을 거친 자료들이 얌전한 파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저하군..
이제 막 정치부에 발을 들여 놓은 햇병아리 기자에게 쉽게 발목이 잡힐 만큼 호락호락한 비서관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보내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자료를 눈으로 훑어 내리면서, 그의 깐깐한 외모만큼이나 철두철미한 사무처리 능력을 보며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는 꿈속의 그와 다른 인물이었던 것일까??
어이없는 사고의 귀결에 스스로 웃음이 났다.
어쩌면 꽤나 오래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나마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에는 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는 분명..
온몸을 열어 나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마음 깊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입안이 씁쓸해져 왔다.
무정해 보인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 나였지만, 혐오에 가까운 거부라는 경험은 아무래도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비록 하룻밤으로 끝나버릴 관계일지라도 말이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분명 그도, 그리고 나도..
절대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