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의식적으로 새해 인사를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는 기독교인이건만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작복(作福)'에서 유래한 인사말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새해에 서로 복을 많이 지으라고 인사를 나누었다고, 전에 국문과 박사과정이시던 누님께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뜻도 좋고, 예부터 쓴 말이고 해서 이렇게 인사하게 되었는데요.
작복에 대해서 좀 알아볼까요.
아무래도 이런 건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니까 좀 퍼오겠습니다.
출처는 '마성 글 모음집(마성 스님 / 팔리 문헌연구소장)http://ripl.or.kr/Archives/Private/private.htm'입니다.
(.. 전략..)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복을 짓고 받은 분은 석가모니불이다. 그 분께서는 얼마나 큰 복을 지으셨기에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2500 여 년이 지났건만, 그 분의 형상을 모시고 그 분과 같은 복색만 하고 있어도 최소한 먹고 입고 살수 있는 집은 걱정이 없으니, 저 점술가나 역술가들도 한결같이 불상을 모시고 영업을 하고 있다.
한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아니룻다를 위해 복을 지은 일이 있다. <증일아함경>의 역품(力品)에 나오는 '복 짓는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많은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설법 도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일렀다.
"아니룻다,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타이름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지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했다. 아니룻다의 증상을 살펴본 지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께서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 너는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 것이다.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고,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먹이로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끝내 고집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궤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로 법의 몸인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이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 후략..)
불교적 지식이 짧아서 다는 몰라도 작복이라는 것이 자신을 열반으로 이끄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불교인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흔히 '기복(祈福)'이라고 해서 복을 빌지요. 그래서 새해에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 같은 인사를 합니다. 이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늘 깨어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기다리는 동안 잠들지 말라고 가르치지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라는 것은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표현을 좀 바꾸어서 스스로의 복을 지으라고 가르치는 것 아닐까요. 다만 차이점은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이므로 구원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고, 불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겠지요. 불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불교는 자신을 닦아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하고, 중생을 제도하려 애쓰는 것이지 부처를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불교계에서도 너무 기복적인 신앙보다 작복하는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내용의 자성과 움직임이 하나둘씩 보이고 있습니다.
어쨌든, 멋지지 않습니까? '자신의 복은 스스로가 짓는다'는 것 말입니다. 흔히 쓰는 격언으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죠. 역시 오래 남아서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말은 이렇듯 비슷한 진실을 담고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