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조숙함에 화가 나다.' 뒷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은 유난히 반 전체가 사이가 좋았었다.



수학 여행에 가서 술도 한 병 싸온 녀석이 없-을 만큼 사고칠 객기도 없으면서 놀 때는 시끄러운집단이-었지만, 옆 방을 쓰던 다른 반 놈들이 술 마시고 논 줄로 착각할 정도로 그렇게 시끄럽고 왁자지껄하게 지내던 친구놈들이었다.



우스웠다.


그런 녀석들이 취직 걱정을 하더니, 상사욕을 하더니, 선을 본다더니, 결혼을 한단다.


그 때 그 녀석들-전부 19명이나 되는 엄청난 집단-이 전부 모여서 '삼촌'-나이 들어 보여서 붙은 별명-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교복이 아닌 '나는 회사원입니다.'라고 써있는 것 같은 정장을 입은 녀석, 군대 다녀와서 학업에 유독 불타오르더니 여태 학교에서 안 떠나고 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 녀석, 대학교 때 사고쳐서 결혼하더니 30대 중반에 벌써 잘 나가는 퓨전 라면집 사장이 되어 있는 녀석까지 그렇게나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모여서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모인 호프집이-XXX광장인데도-떠나가도록 떠들고 있었다. 그 중에 섞인 나는 학생 때는 고등학교 때는 그다지 놀지도, 그렇다고 공부를 썩 잘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녀석이었고, 군대에 다녀 온 다음 매진한 고시 덕분에 어쩌다 운좋게 지금은 은근히 철밥통을 자랑하는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삼촌은 자세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방송국에서 무슨 촬영 쪽 일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기 말로는 더럽게 힘들고 피곤하다면서 거기서 결혼할 사람까지 만나고 있었단다.




"야, 철밥통!! 너야말로 선보라고 줄 서지 않냐?"
"줄은 무슨.. 그냥 좀 우리 엄마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릴 뿐이지.."
"너 진지하게 묻는 건데 말이다.. 한 대 맞고 싶냐?"





실없는 농담도 10년이 넘게 잘 받아쳐주는 녀석들. 정신 없는 가운데 나와 똑같은 질문 공세에 휩싸인 그가 보였다. 고등학교 때도 이 괴물같이 우락부락한 녀석들의 끊임없는 장난질에도 항상 웃기만 했던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쏟아지는 질문에 그저 '내가 원래 그렇지 뭐.'같은 소리나 하면서 미소로 얼른 관심 공세에서 벗어나려 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남자답게 잘 생겼음에도 무언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남자답게 생겼다고 하기에는 마르고 '기집애'같이 생겼긴 했지만 말이다. 그가 활발하거나 시끄러운 성격이 아니었어도 이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아마도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실제로 그가 없을 때 그가 무엇이든지 뭔가를 할 때 그 모습이-심지어 수업 시간에 거의 얼굴을 다 가리는 뺑글뺑글 돌아가는 뿔테 안경을 쓰고 책만 들여다 보고 있을 때마저-꼴린다고 스스럼 없이 말해서 나한테 미움 -같은 반 친구 녀석을 그렇게 보다니 인간 이하로 보였으니까-받게 된 사람이 여럿이었으니까. 확실히 나한테 그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좀 조용하고, 전교에서 놀 정도는 아니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보통보다-특히 단거리 달리기를-잘 했고, 영화도 책도 음악도 많이 전부 다 좋아하는 그런 동료 정도.





"뭐야. 그럼 딱 이제 너희 둘 남은 거야?"
"그러고 보니 그렇네. 뭐냐. 한 놈은 철밥통에, 한 놈은 인기 드라마 작가 아니야?"
"내 말이. 너희 뭐 문제 있냐? 솔직히 말해 봐. 이 형님이 어디 병원이라도 소개시켜주랴?"
"네 앞가림이나 잘 해. 웬 남 걱정이래. 맨날 일부러 집에 늦게 들어간다며?"





니글니글한 아저씨 놈들.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결혼하자는 소리를 안 해."
"오오오오오오오. 초특급 특종! 꽃미남 주민규 좋아하는 사람 있었다!"
"삼촌은 시끄럽다, 주민규가 행운의 주인공을 직접 밝혀라! 밝혀라! 밝혀라!"



순식간에 안 그래도 시끄러웠는데 더 시끄러워지는 놀라운 녀석들. 아예 이젠 밝히라며 구호까지 외치고 있다.

어디서 저 성량이 다 나오는 건지.
하긴.. 어디 가서 목소리가 작다는 말 들어본 적 없었던 나도 저 녀석들 틈에서는 여섯, 일곱 번째 정도밖에 못 했으니.




"그냥, 뭐 공무원이야."
"오울~ 꽃미남 주민규에 맞게 쭉쭉빵빵이셔?"




고작 저런 말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그. 저래서 대체 사회 생활 어떻게 유지하는 거야?

근데 오늘 평소보다 좀 말수가 많네. 벌써 취했나?



"쭉쭉빵빵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멋있어."
"오울~ 멋있대! 멋있대! 멋있대!"
"세상에 어떤 여자가 주민규한테 멋있기 씩이나 하냐~ 빨리 밝혀라! 밝혀라!"
"뭘 밝히라는 거야.."


이미 이 이상 더 빨개질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색을 하고 있는 그는 역시나 10년 전이나 후나 다를 것 없는 저 괴물들의 짓궂은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갔는데?"



야, 너희들이 아직도 고딩이냐. 아저씨들 주제에 관심사하고는.
그런가 하면 당하고 있는 주민규의 모습도 오랜만이다. 늘 녀석들의 어떤 장난에도 노인네 같이 빙긋 웃으면서 넘기다가도 녀석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평정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그였었다. 더군다나 화제가 이렇다면 더욱 당연한 전개.



"뭐.. 가..?"



하긴 그건 필시 어디까지 갔느냐 보다는 피끓는 10대의 망상을 자극했던 대상의 얼굴도 모르는 그 연인에 대한 본능적 궁금증일 터였다.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면 갈 데까지 갔을 거 아냐?"



한 녀석을 삥 둘러 싸고 잡아먹을 듯 추궁하는 모습에 호프집 안 다른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참에, 더욱 위축된 그가 앉아있는 소파 속으로 푹 꺼질 것 같다.



"이거 장난이 아닌가본데~ 말도 못 하는 거 보니까.."



그가 가타부타 말이 없자 다시 한 번 그를 부추기기 위해 능구렁이들이 민규 쪽으로 잔뜩 수그렸던 몸을 펴며 조금 흩어지자 녀석들의 사이사이로 내 눈치를 살피는 그가 보였다. 왜 내 눈치를 보는 거야.



"어쩌면.. 그냥 나만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 결혼. 그 사람은 별로 생각 없는지도 몰라."



흩어지던 무리들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그의 말투에 흠칫 놀라서, 수많은 손으로 민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줄잡아 10개는 족히 넘는 손길에 안심한 표정으로 헤실 웃는 그의 웃음이 지독히 아름다운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짜식, 멀쩡히 잘 생겨서 왠 짝사랑이냐?"
"누군지 나중에 엄청 후회할 거다, 너랑 결혼 안 하는 사람."
"그래봤자 공무원이지, 연봉 추측 불가능의 인기 작가 주민규만 하려고? 안 그러냐, 철밥통?"



돌연 쏟아지는 시선에 '응?'하다가 단지 공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화살이 내게 돌려졌다는 걸 깨닫고 녀석들의 역시 줄잡아 10개도 넘는 무지막지한 손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걸 느끼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하는 민규의 표정이 스쳤지만 날아오는 주먹과 손들에 욕을 한 마디씩 붙여주느라 차마 마주봐줄 틈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야, 야! 축의금 10만 원부터 받는다! 공짜 밥 먹으면 죽여버린다."
"어이구, 저거 신랑이 말하는 꼴 하고는. 어디 결혼식장에서 살인극이라도 하게?"
"야, 야. 아무도 가지 말아버려. 우리 간다~"
"너흰 어디로 가냐?"
"어, 나 일부러 술 안 마셨잖아. 차 타고 간다."
"우리 민규는?"



누구 마음대로 우리 민규냐.



"응? 윤석이랑 같이 가면 돼."
"저 녀석이랑? 저 놈은 위험해서 안돼. 내가 택시 잡아줄게."
"아니야. 괜찮아. 괜히 비싼 돈 쓰지 말고. 너나 대리운전 불러서 어서 가야지. 네 색시감이 걱정하겠다."
"걱정은 무슨. 대리운전은 벌써 와 있어. 조심히 가라. 야, 민규 잘 바래다줘라. 간다!"



취한 주제에 끝까지 민규를 챙기는 삼촌. 그래, 삼촌은 옛날부터 어른스러운 그를 유독 안쓰러워 했었지.




"가자."
"그래."



녀석들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같은 집에서 사는 것도, 녀석들 모르게 대학교 때 내가 민규를 홀랑 빼돌린 사실도 모른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그냥 조금."
"어째 애들이나, 너나 하나 변한 게 없냐. 똑같아요, 똑같아."



그래, 조금쯤은 격앙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여느 때와 달리 그를 나무라는 것 같은 말투가 되어 있다.



"내가 뭘.. 많이 변해버린 것 보다 낫지 뭐. 그나저나 삼촌이 진짜 장가를 가네."
"그러게. 딴 놈은 다 연락 끊겨도 삼촌은 끈질기게 너한테 연락하길래, 너한테 흑심있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경계했는 줄 알아?"
"별걸 다 경계씩이나 하시네요, 황윤석 씨."




아깐 그렇게 긴장했었으면서 약오르게 또 내 앞에서는 여유만만인 그가 얄밉다.




"피곤하지 않아?"
"전 댁처럼 약골은 아니라서요..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거나 하진 않거든요?"
"그러세요?"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늘 고마운 마음뿐이면서도 대답은 어린애처럼 발끈해서 비뚤어 나간다.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런 데서 늘 실패하고 만다.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술을 마셔서 그런지 조금 풀린 듯한 눈 정도.





"미안. 나 좀 먼저 씻을게."
"응."




욕실에 들어가는 그를 보고는 소파에 털썩 앉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아침부터의 일이 머리 속에서 슬슬 흘러간다. 역시, 조금은 힘들었던 건가, 하는데 문득 아까의 술자리에서 민규가 한 말이 스쳐지나갔다.




-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결혼하자는 말을 안 해..






자신 없게 말한 그의 목소리가 아깐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주제에 지금은 이렇게 귓가에 콱 들어와 박힌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그거 나한테 한 말인가? 나한테 한 말이겠지. 내가 잘 알고 있는 주민규는 그런 이야기가 오갈 만한 여자가 없으니까. 하긴, 또 모르는 일이다. 그에게는 정말 끔찍하게도 소중한 그 어머니의 실망을 대가로 나에게 온 그였기 때문에,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 몰래 선이라도 몇 번 봤는지도.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소파에 앉은 채로 잠깐 잠들었는지 시원한 감촉에 눈을 떴다. 눈을 떴으되 몽롱한 기분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잠자코 앉아 있었다. 시원한 감촉의 정체는 그가 가져온 물수건으로 소파에서 잠들어버린 나를 씻기려고 가져와 내 얼굴이며,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갈아입은 민소매 면 티셔츠와 트레이닝 반바지 덕분에 그가 내 재킷을 벗기려고 낑낑대는 수고는 안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까지 닦은 후에 수건을 빨래통에 넣어놓고 돌아와서는 소파에 앉아 무릎에 나를 눕혔다.



오랜만인가.
전엔 이렇게 누워서 TV를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하고 그가 입에 넣어주는 간식들을 받아 먹기도 했는데..

이래저래 늘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구나, 난.

요즘 부쩍 업무가 늘어서 같은 집에서 몇 마디 나누지도 못 하고 밥 먹고 잠 잘 시간도 모자랐던 나를 그는 보약이라도 먹여야겠다며 안타까워 했다.


가만가만 내 앞머리를 넘겨주는 민규의 손길이 나른해서 다시 잠들려는데 그의-밤이라서 약간 잠긴 것 같은-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지? 방에 가서 자. 아침에 허리 아플라."
"조금만 있자. 오랜만이잖아."
"하여튼.."
"민규야.."
"왜.."
"시 같은 거 낭송해봐."
"뭐야, 낯 간지럽게.."
"왜~ 전에는 분위기 좋으면 가끔 해주더니만.."
"지금이 분위기가 좋냐?"




콩- 하고 쥐어박는 것 까지 아주 주민규가 애인이 아니라 엄마라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겠다.





"우음 2장 -구상

나는 내가 지은 감옥속에
갇혀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밤인데다가 술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더 잠긴 그의 목소리가 눈물이 나와버릴 것처럼 감동적이어서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그를 만난 지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서 이젠 두근거림 같은 건 부끄러울 정도의 30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뛰는 가슴이 자랑스럽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자?"



남들이 그렇게 흔하게 아무나 하는 그 결혼이라는 것. 그래, 심지어 삼촌도 하는 그 결혼. 아까 그 말은 그렇다면..



"아니.. 민규야.."
"응? 들어가자, 얼른."
"민규야.."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졸리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두서 없이 걸러지지 않은 말들을 내뱉었다.



"결혼.. 하고 싶어..? 아니면,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어머님이.. 아얏!"



이번에는 그냥 꿀밤이 아니라 정말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픈 한 방을 먹었다.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아서 그의 얼굴을 보니 눈은 조금 전의 말랑말랑 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거짓말인 듯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그답지 않게 노기를 띠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래? 누가 결혼 못 해서 환장했다든?"
"아니. 너 아까.."
"그래. 아까 결혼 얘기 하긴 했다. 근데 넌 상상이 꼭 그렇게 밖에 안돼?"



눈에서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무심코 닦아주려고 손을 들었는데 노기를 풀지 않은 눈에 닿기도 전에 그는 손으로 탁 쳐냈다.



"그깟 알량한 결혼이 하고 싶었다, 그래. 내가 엄마 얼굴 안 본다면서 이렇게 나와놓고는 그 알량한 결혼 하고 싶었다고, 바보야!"
"민ㄱ.."
"이름 부르지 마! 너는..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래도 되는 거야.."


기어이 떨어져 내리는 눈물에 내가 잘못했다는 건 느꼈지만 이렇게나 어리석은 나는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기대지도 않고 아래만 쳐다보는 채로 눈물을 떨구는 통에 소파와 그의 바지자락에 눈물 자국이 번져갔다. 한참 눈물만 흘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싶지도 않은데.. 누가 하란다고, 아님, 죽어도 해야겠다고 마음에도 없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나를 그렇게 몰라?"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이 끊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몰라.. 나를.. 응..?"



아래만 쳐다보던 눈을 내게 맞춰온 순간, 상처받은 그의 눈에서 모든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짓을 한 건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그냥, 이렇게 어쩌다보니 같이 살게 된 우리 두 사람을 아니, 특히 나를 걱정해준 것이었다.

아까의 그 술자리에서 결혼 안 하냐고 묻는 친구 녀석들의 질문에 했던 둘러대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해버린 내 대답에, 둘만 남았다고 놀리던 녀석들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피곤한 탓에 그다지 밝지 않았던 내 표정에, 그는 내가 있지 않느냐고 하고 싶었던 거다. 대답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지만 내가 있지 않느냐고. 내 눈치를 계속 살핀 것도, 그 사람이 공무원이며, 멋있다고 한 것도, 다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괜히 화살이 내게로 돌려지자 더욱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음을..

그냥 전부 다 나를 생각했던 마음을 전혀 몰라준 내가 서운한 거였다. 다른 소소한 문제도 아니고 그의 소중히 여겨주는 마음을 내가 몰랐던 것이다. 같이 살면서도, 그 흔한 반지 따위도 낯간지럽고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나누지 않은 내가, 그의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내가..



"미안, 미안. 어떻게 미안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미안, 미안. 정말 미안해. 나는 언제나 내 생각밖에 없어. 미안. 아직도 순 어린애야. 네가 필요한 건 난데.. 늘 난 기대기만 하고, 네 마음은 커녕 내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야. 미안. 정말 미안해. 이런 나니까.. 네가 필요해. 계속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있어줘. 내가 아무리 바보짓을 해도 용서해줘. 내가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가르쳐줘. 나는 너 없으면 안 되니까.."




미안함에 안아주지도 못 하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을 사과랍시고 늘어놓았다. 정말 이 순간에도 어이 없는 나란 놈. 사랑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쉬이 잊어버리는 한심한 놈이야.



"바보야, 누가 어딜 간대.. 이런 바보를 사랑한 내가 더 바보지. 이렇게 말했는데도 결혼하자고 말 안 꺼내는 눈치까지 없는 바보를 못 떠나고 계속 걱정이나 하는 내가 더 바보지."




자꾸 숙여지던 내 얼굴을 감싸 안아준 그가 눈물 섞인 부드러운 말투로 나를 또 위로해준다. 따뜻한 손으로 등을 살살 쓸어주면서, 여느 때처럼 그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나를 위해서..

따뜻한 그의 가슴에 안겨서 허리를 두르고 꼭 안고 울어서 빨라진 심장박동이 안정적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냐..? 이쯤되면 결혼하자고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하여튼 황윤석.. 눈치는 그저 다 갖다 팔아먹었지. 얼른 들어가 자자. 내일 출근해야지. 응?"
"민규야.."
"왜? 배고파? 뭐 먹을래?"


풋-. 이 상황에 내가 배고플까봐 걱정이니.


"너도 만만치 않아, 아저씨."


고개만 떼어서 얼굴을 마주보자 아직 몸이 붙어 있기도 했고, 이런 대면에는 약한 그가 상황을 피하려고 돌리려 하는 고개를 다시 돌려 방금 씻고 나와서 향긋한 이마에서 달콤한 코끝, 매끄러운 턱까지 입을 맞추고 고백했다.



"사랑해. 허락된 시간 동안에는 내 곁에 있어줘. 이런 바보같은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다면.."
"바보.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이는 거야."



수줍어서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눈빛과 그토록 부드러운 미소에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 바보에게 그는 다시 키스해주었다. 길고 긴 잠에서 깨는 키스가 아닌 깊고 깊은 사랑에 빠뜨리는 키스를.

Posted by highenough